매일신문

[광장] 나의 '금수저론'

전북 익산 출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전북 익산 출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좋은 집안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홧김에 내뱉은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속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참으로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퍼붓는 딸의 모습에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손에 쥐면 부서질까, 금지옥엽 키워온 자식이 원망 섞인 독설로 비수를 꽂는 순간,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을까.

쉽지 않은 길이라 말리던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아나운서에 도전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홀로 서울 생활을 하며 시험을 준비하기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여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서서히 실력도 인정받아 각 지역 방송사의 최종 면접까지 몇 번을 올랐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낙방이었다. 당연히 부족한 내 자신을 탓했지만 함께 시험을 치른 친구들 사이에서 루머가 나돌았다. "걔 아빠가 국회의원이래." "그 친구 아버지는 장관이라던데?" 세간의 의혹들은 일부 사실로도 확인됐다. 작게는 교수부터 정치인, 법조인, 기업 대표 등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부모의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합격률을 기록했다.

시작부터 출발선이 달랐다. 그들은 내가 어떤 노력으로도 결코 만들 수 없는 부모의 직업이나 집안의 배경을 화려한 스펙으로 만들어 심사위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가족의 신상 기재가 합격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비정한 현실에 절망했고 분노했다. 불합격의 원인을 부모 탓으로 돌리며 절대 하지 말아야 될 말로 부모님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다. 그런데 혹여나, 이번에 터진 '로스쿨 부정 입학' 논란에서 억울하게 탈락한 학생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로스쿨 입학 전형에 대한 전수조사에서 합격자 중 24명이 부모나 친인척의 신상이나 지위를 자기소개서에 보란 듯이 적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금수저'임을 내세우고 뻔뻔하게 특혜를 바란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사실 이번에 드러난 로스쿨의 부끄러운 민낯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난해 신기남, 윤후덕 의원이 로스쿨에 다니는 자녀를 위해 학교에 압력을 넣고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 때문에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더불어 지라시(사설 정보지)에는 로스쿨을 나온 '고관대작 자녀들'이 로펌에 취업한 명단까지 떠돌아다녔다. '현대판 음서제'를 보면서 실망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청춘들이 있다면 나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6천 명의 로스쿨 재학생 중, 나 하나로는 자신이 없어 부모의 후광에 기댄 24명의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입시 요강을 어기면서까지 부모의 이력을 적은 8명의 위반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성인이 된 자녀의 졸업부터 취업까지 영향을 미치려 압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저지른 창피한 부모를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당하게 온전한 내 노력과 실력으로 합격한 5천976명에 들기를 바란다. 분명 부정보다는 공정한 경우가 많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볼 만한 세상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중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 결과 나는 1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나운서라는 꿈을 이뤘다. 부모의 도움 없이도 오롯이 나만의 노력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에 남다른 자부심이 강했다.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날, 나를 뽑아준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정미 씨는 음성이 아주 좋아. 부모님이 참 좋은 재능을 주셨네." 울컥했다. '흙수저'라고 불평만 했던 나를 반성했고 아나운서로서 적합한 목소리인 '금수저'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할 수 있을까. 진정 어버이의 은혜는 가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다섯 살배기 아들도 언젠가 이 글을 꼭 보길 바란다. "보고 있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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