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6·25때 대구 공군사령부 근무, 비군인 교환원 유덕수·구금옥 씨

"포성 속 부대간 전화연결 진땀 흘렸죠"

한국전쟁 당시 비군인 여성으로 공군 통신교환업무에 자원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유덕수(왼쪽) 씨와 구금옥 씨가 국가유공자증을 보여주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한국전쟁 당시 비군인 여성으로 공군 통신교환업무에 자원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유덕수(왼쪽) 씨와 구금옥 씨가 국가유공자증을 보여주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포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출근했지. 총 들고 싸우던 군인들 뒤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었어."

구금옥(85'여) 씨와 유덕수(84'여) 씨는 2014년 국가보훈처로부터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참전 60여 년 만이다. 여성, 특히 군인이 아닌 신분으로 인정받은 참전유공자여서 의미가 더욱 컸다.

이들은 굉음을 울리며 터지는 포탄 소리를 뒤로하고 긴박하게 걸려오는 부대 간 전화를 연결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그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6'25전쟁 당시 두 사람은 대구 공군사령부에서 비군인으로 교환원 업무를 했고, 60년이 훌쩍 지난 2014년 국가보훈처로부터 참전유공자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우체국 교환원으로 일했던 유 씨는 전쟁이 터지면서 대구로 오게 됐다. 공군에서 교환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1952년 공군사령부 본부에서 10여 명의 다른 여성과 함께 교환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유 씨는 "주로 부대 간의 전화를 연결해줬지. 군인은 아니지만 군복을 입고 군인의 감독을 받으며 일을 했어. 절대 밖에서 일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지. 전쟁통이니 살벌할 수밖에 없었어."

만 1년을 전쟁에서 공군 교환원으로 활약한 유 씨가 참전유공자로 지정되면서 떠오른 건 함께 근무했던 10여 명의 다른 교환원 동료. 대부분 대구가 고향이었던 그들을 보훈처에서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비군인 참전자들은 기록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아 지금은 어딨는지 모른다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인데 다들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대구전화국에서 근무했던 구 씨는 피란을 떠나는 대신 고향인 대구에 남아 공군사령부 보급창에서 교환원으로 일하게 됐다. 군용 트럭을 타고 출'퇴근하던 길에 들리던 포탄 소리가 너무 싫고 무서웠다. "그때 북한군이 칠곡까지 왔다는 소리를 들었어. 북구 칠성동이 집인데 근처인 대구역에 포탄이 떨어졌어. 저녁만 되면 쏴대는데 무서워서 몸서리를 쳤지."

구 씨가 대구를 떠날 수 없었던 건 참전용사인 오빠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이 터지자 외동아들이었던 오빠가 징집됐고,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죽었겠죠. 그때 전쟁 때문에 가족 잃은 사람이 하나둘이겠나. 요즘 사람들은 그런 고생을 전혀 모르겠지만 우리는 죽어가는 내 가족 같은 군인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현충일만 되면 그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지. 나라 지키느라 젊은 나이에 간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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