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가면 뒤에 숨은 미소

며칠 전 대구시내 한 대학병원 A교수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A교수는 뇌질환 관련 재활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전문의다. 그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환자를 보험사가 정신질환자로 둔갑시켰다"고 분개했다. 지난 2013년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이 없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A교수는 이 환자가 교통사고로 외상성 뇌손상과 외상성 뇌신경 축색손상을 입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보험사는 A교수와 환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뇌손상을 입은 원인이 지병인 조현병 탓이라는 게 이유였다.

보험사는 자문의사의 자문소견서를 근거로 댔다. 그러나 자문의사는 환자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보험사가 제공한 자료만 봤을 뿐이다. 심지어 조현병이 어머니 탓이라며 어머니와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A교수는 이 자문의사가 과도한 자문료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대학병원 교수들이 법원의 의뢰로 환자를 진료하고 감정서를 작성하면 20만원을 받지만, 이 자문의사는 보험사로부터 150만원을 받았다는 것. 또 심사회신서에 "이 자료는 법적 송무자료로 사용할 수 없음"이라고 적어 소송 책임을 피하려 했다는 게 A교수의 설명이다. A교수는 "보험사와 자문의사가 교통사고로 폐인이 된 청년을 지병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놀랍고 경악스럽다"고 했다.

보험사의 행태는 실손의료보험에서는 사뭇 달라진다. 대구 달서구의 한 병원 안내데스크에는 보험사 대리점 직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가입자를 모집하고, 실손보험으로 진료비를 지원받는 방법도 상세하게 알려준다. 이 병원에 설치된 고가의 의료 장비는 치료 비용이 수백만원에 달하지만 수요가 꾸준하다. 이 병원 관계자는 "솔직히 실손의료보험이 없으면 누가 이 비싼 치료를 받겠냐"고 했다.

실손의료보험은 건강보험 본인부담금이나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비급여 의료비를 지원해준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가입자가 3천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손의료보험은 이상한 보험 상품이다. 모든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보다 더 많은 보험금을 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입자는 보장이 필요한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소비자는 '도덕적 해이'를, 공급자는 '부적절한 의료행위'를 조장하며, 보험사는 '가입자 관리 및 급여비 지출관리 실패'를 보험료 인상으로 만회한다. 실제로 올해 보험사들은 실손보험료를 18~27% 올렸다. 손해율이 120%가 넘는다는 게 이유다. 반면 지난해 민간보험사들이 챙긴 당기순이익은 6조3천억원에 이른다. 보장 제외 항목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정맥류의 레이저 시술이 제외된 것을 비롯해 백내장 수술과 도수치료도 모두 실손보험 약관에서 빠져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손의료보험은 본인부담금 제도를 교란시켜 의료 오'남용을 조장하고, 의료비 총액의 일부를 건강보험에 청구해 보험 재정을 흔든다. 금융위원회가 추진 중인 병'의원과 약국이 소비자 대신 실손보험료를 보험사에 직접 청구하는 정책도 우려스럽다. 국가가 맡고 있는 지불제도를 보험사가 대신함으로써 병'의원과 약국에서 일어나는 의료행위를 통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실손의료보험이 의료민영화의 씨앗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건강보험체계는 여러 허점에도 불구하고 국민 누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의료체계의 근간이 흔들릴 때 어떤 상황이 닥칠지는 미국식 의료체계를 통해 충분히 봤다. 매달 100만원이 넘는 보험료를 부담하면서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없고, 보험사는 보험료를 주지 않으려 소송을 남발하며, 미미한 병력이 있어도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의료체계. 민간보험이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미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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