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현실 동화-인어 공주

물빛은 에메랄드색 사진 속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둘은 고상한 척 들고 나온 책을 태닝 베드에 집어던지고 녹조가 낀 바다로 뛰어들었다. 작열하는 태양빛은 바다 속으로 적셔지면서 힘을 잃고 드러난 어깨와 목만 애써 괴롭혔지만, 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밀려나온 땀 때문에 모공이 온통 선크림으로 하얘져 볼품없는 얼굴이 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실없이 킬킬거렸다. 염분이 높은 바닷물 덕분에 그는 물개 수영을 뽐내고 그녀는 그런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해변으로 돌아와 베드에 누워 주스를 홀짝이며 두 사람은 이 꿈 같은 휴가가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곳은 파라다이스였다. 모든 사람들이 친절했고 모든 경험들이 새로웠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고, 그 또한 평소 어느 때보다도 그녀에게 다정한 연인이었다. 좀처럼 사진을 남기지 않던 그도 이번만큼은 먼저 나서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낮이면 원 없이 수영을 하고 이국적인 음식들을 맛보고 밤이 오면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 비현실적인 행복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끝나버릴 한순간이 금방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속에 가득한 사랑으로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날 밤,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다시 돌아가서 현실을 살아야 하니까."

그녀는 이 꿈 같은 시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미 저만치 먼저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그의 이름을 불러도 그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를 향한 사랑의 말들은 맺어지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공기 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이 눈동자에 맺힌 눈물로 부옇게 흐려졌을 때 그녀는 결심한 듯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그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는 놀라 돌아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부드러운 물속에 떠다니던 녹조들이 그녀의 하얀 원피스 위에 내려앉고 그녀의 목 위로 물이 찰랑거릴 때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 그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흐려진 눈동자로 갑자기 버려진 아이 같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곧 달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검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가 사라진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삼킨 바다가 별들마저 수평선 너머로 삼켜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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