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함께] 인연

도종환(1954~ )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중략-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 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을 보면 당신도 누군가 당신을 지나간 자리에 대해 써보고 싶은가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쓴 마음을 뱉어낸 자리에 어느덧 들풀이 자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얼굴이 산 밑으로 떨어져 돌아오지 않을 때, 당신도 마음이 당신이 아플까 봐 먼저 지나간 자리에 대해 써보고 싶은가요? 말을 피우는 삶이 옆에 있어서, 당신이 폐지나 줍는 사람이라면 좋겠어… 말이 꽃이라면 다 시들어 버렸는데, 그래도 마음을 쓰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나요? 아직도 산 냄새가 난 사랑을 하고, 방으로 길 잃은 들을 들여와 재워 주고 싶나요? 무릎과 발등에 앉았던 새의 냄새, 그 사람의 파란 발등에서 나는 냄새, 한낮 오후의 미열 속에 보았던 흰 빛 냄새, 그때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말하고 싶나요? 인연이란 고약한 것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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