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만난 그는 왜소해 보였다. 10년 만에 만난 그는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각종 병마와 혈투를 벌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는 1주일간 경상남도 일원을 혼자 돌며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혼여'(혼자 하는 여행)다. 수년 전 위암 대수술을 받았고, 최근엔 중풍으로 발 수술까지 받으면서 약해진 마음과 몸을 추스르기 위한 힐링 여행이었다고 했다. "예전과 같지 않은 몸 상태인지라 혼자 하는 여행이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은 위안을 얻는 계기가 됐어요. 오로지 무대 위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그동안의 인생을 반추하고 추스를 수 있었어요." 올해 연극 인생 46년을 맞은 연극인 김현규(71'우전 소극장 대표) 씨 이야기다.
김 씨는 지난해 일흔을 넘긴 대구 연극계의 최고령 현역 배우이자 산 증인이다. 그를 빼놓고서는 대구 연극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대구에서 연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4년 '신무대'에서부터 '인간무대' '공간' '원각사' '넝쿨' 등 여러 극단을 거치며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특히 1965년 극단 '징'의 연극 '해풍'을 통해 배우로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이후 40대 후반 나이에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 오직 배우의 길만 걸었다. 참여한 연극 작품 수만도 200여 편이 훌쩍 넘는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고(故) 이필동'황철희와 '신연극 중흥' 운동을 선언하면서 대구 연극계에 큰 획을 긋기도 했다. "당시 연극계엔 외국 번역극이 주였고, 창작극은 거의 없었어요. 우리가 주도한 신연극은 말하자면 '우리 희곡'을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에게 2008년 찾아온 암은 충격이었다. "70㎏이던 몸무게가 몇 달 만에 40㎏이 되더군요. 생사의 기로란 말이 실감났어요." 하지만 2007년 1월부터 장기 공연한 뮤지컬 '만화방 미숙이'에서 만화방 주인 장봉구 역을 맡았던 그는 이듬해 암 수술을 받고 1년 뒤 다시 무대에 오르는 기적을 일으켰다. "웬만한 육신의 병은 무대에서 땀 흘리고 나면, 나도 모르게 가뿐해지는 위력을 발휘했어요. 관객의 힘이지요." 암이라는 지독한 병마도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극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그는 '만화방 미숙이'를 주저 없이 꼽는다. "서민적이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관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에요. 그런 무대에 설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만화방 미숙이는 서울 대학로에 입성해 2개월 동안 공전의 히트를 치며 대구 연극의 저력을 부각시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김 씨는 지난해 고희(古稀) 기념공연을 열었다. 2005년 사비를 털어 개관한 '우전 소극장' 무대에 70세가 되기까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집대성한 작품을 올려 더욱 감회가 남달랐다고 했다. 우전 소극장은 마땅히 공연할 무대가 없어 고민하는 후배들을 위해 김 씨가 대명동에 마련한 소극장. 이 소극장은 현재의 대명공연문화거리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전'(友田)은 유난히 벗을 좋아했던 그의 지인들이 '친구들의 텃밭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김 대표의 호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불 꺼진 객석, 무대 위 배우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어요. 정해진 시간에 실수없이, 약속대로 연기를 마쳐야 합니다. 연극 무대야말로 진짜 실력 있는 배우만이 설 수 있는 곳이에요." 김 씨는 대구 연극인들이 힘든 연극계 상황에 좌절하지 말고 실력 하나 믿고 열정적으로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1주일간의 여행 동안 인생 2막을 짜고 돌아왔다는 김 씨는 바로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로 다시 관객들 앞에서 서기로 한 것.
"눈 감는 날까지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연극에 몸 던져 매진하는 후배 연극인과, 무대 뒤에서 후원해주시는 분들, 또 우리의 열정에 항상 성원해주시는 관객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곳은 무대 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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