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로부터 월정교'월성으로 이어지는 늦가을 길은 무척 고즈넉하다. 마지막 푸름을 뽐내는 잔디와 낡아가는 낙엽은 바스락거리는 바람으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 가을 바람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미 천년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신라시대 전설이 함께 길동무가 된다.
지진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천년고도 경주에 모처럼 활력이 돌았다.
'2016 함께 걷는 경주 왕의 길' 행사가 열린 5일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남녀노소, 외국인 등 2천500여 명은 가을 정취와 경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특히, 이날 행사에 전 세계에서 모인 외국인 관광객 50여 명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전통관광체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한국관광공사 '위즈웰'을 통해 참가를 의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라 전통 복식을 갖춘 내빈과 경주대학교 전통 풍물놀이패를 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분주했다.
독일에서 온 사브리나(22) 씨는 "다채로운 행사가 흥미로웠고, 한국을 더 많이 배우는 시간이 됐다"며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신라 왕들이 이런 곳에서 살았다면 정말 행복했을 것 같다"고 했다.
5㎞ 구간 체험 코스는 행사의 백미였다. 그동안 복원 공사로 내부를 볼 수 없었던 '월정교'와 이날 준공식을 한 '신라탐방길'이 처음 공개된다는 소식은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했다.
참가자들은 출발 신호와 함께 첫 코스인 천년의 숲 '계림'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선 '계림- 통일신라의 정신을 깨워라' 미션이 기다렸다. "금궤야 열려라!"를 큰 소리로 말하면 도장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 참가자들은 목청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이 소리에 무심코 길을 지나던 관광객들도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원효 대사와 신라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있는 월정교에서는 고대 교량 축조법과 토목 기술을 보여준다는 설명에 모든 참가자들의 발길이 머물렀다. 이곳에서는 '월정교-백성사랑 마음을 담아 기둥을 세워라'라는 미션이 열렸다. 백'성'사'랑이라고 새겨진 4개의 기둥 모양 비닐 풍선을 불어 세우는 미션으로 원효 대사의 백성 사랑을 담았다.
김정주(44'대구) 씨는 "선조의 놀랍고 아름다운 솜씨를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며 "마지막까지 잘 복원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 번째 미션지인 화백광장으로 가는 숲길은 늦가을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떨어지는 낙엽,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여유와 청명함을 선사했다. 화백광장으로 이어진 길 중간에 있는 '화백정' 정자에 들러 사진을 찍고 잠시 쉬어보는 등 지루할 틈이 없었다.
분기점인 화백광장에는 난도 높은 'O, X' 퀴즈가 참가자들을 맞았다. 4, 5명이 문제에 같은 답을 해야 통과할 수 있는 코스. 혼자 문제를 틀린 사람은 일행의 장난 섞인 야유를 받으며 얼굴이 빨개지는 웃기지만 슬픈 수모(?)도 겪었다.
도장을 받은 참가자들은 월정교를 지나 다음 미션이 있는 월성복원터 내 석빙고로 향했다. 길 중간 중간 도로에는 경주경찰서 경찰관 10여 명이 배치돼 사람들이 안전하게 통행하도록 힘을 쏟았다. 석빙고 미션은 블록쌓기였다. 월성의 성공적인 복원과 경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5㎞ 여정 말미에는 이날 행사의 마지막 미션지인 첨성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잦은 지진으로 침울한 경주 시민을 위로하는 뜻에서 '안'전'경'주'위'기'극'복'이라는 문구 속 공간에 직접 지장을 찍었다.
지금껏 미션을 수행하며 도장을 받은 종이는 행사장으로 돌아와 푸짐한 상품으로 보상됐다.
한편, 이날 경주대학교에서 나온 자원 봉사자와 각종 단체의 도움이 쌀쌀한 날씨에도 온기를 돌게 했다. 교수와 학생들이 준비한 따뜻한 어묵탕, 고소한 팝콘, 주먹밥 등 다양한 음식은 이른 아침부터 경주로 오느라 허기졌던 이들의 배를 채워줬다. 바로 옆 부스에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주소방서 대원 10명이 대기했으며, 심폐소생술과 소화기 사용법도 참가자들에게 교육했다. 경주대 축구부 선수 10여 명도 참여해 진행을 돕고 직접 행사에 참여하는 등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경춘 경주대 축구부 감독은 "축구부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 아예 경주를 전혀 모르는 신입생도 많다. 이들에게 경주 역사와 얼을 알리고 싶어 참여했다"면서 "학생들이 신라의 역사와 경주의 문화에 녹아들기에 충분한 행사였다"고 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