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르신 수상(隨想)] 때늦은 벌초

낙엽이 지고 바람이 싸늘한 가을날.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영양에 모셔져 있는 증조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하러 아내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대구에서 승용차로 부지런히 달려도 4시간 넘게 걸린다. 도로변 산기슭 들녘에는 가을 농사를 마무리 짓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올 팔월 추석 전에 집안 동생들과 아랫대가 함께 벌초를 했다. 낮은 산기슭에 모셔져 있는 고조부모님과 그 아랫대 벌초를 마치고 해발 800여m의 산 위에 모셔져 있는 증조부모님 산소에 올라가려고 하니 능선으로 나 있는 길은 온데간데없고, 가파른 비탈에 오리나무와 단풍나무 잡목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동생들과 산을 올랐지만 산소를 찾을 수 없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고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 포기하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다 낙엽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다시 증조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갔다. 이 산소를 모실 때만 해도 능선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길이 반들반들하게 나 있었다. 할아버지 삼 형제 분 중 맏집 당숙부님께서 강원도의 이름 있는 지관을 모셔다가 석 달 동안 명당을 찾아서 공을 들여 이장을 한 곳인데 지금은 올라갈 길이 막혀 묵히게 될 형편이다.

아내는 올봄에 왼쪽 무릎 관절 수술을 하여 무리하게 걸으면 무릎이 부어오른다. 무성한 숲을 헤쳐가며 산에 오르는 것이 아내에게는 힘겨운지라, 산 밑 차에서 쉬고 있으라 해도 혼자 있으면 무섭다는 핑계로 따라 오르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예초기를 짊어지고 숲을 헤치고 넘어진 나무토막을 타고 넘어 산소에 당도하니 잔디는 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잡초와 잔가지는 낫으로 베고 산소 앞을 가리는 잡목은 톱으로 잘라 산소 주변을 말끔히 했다. 준비해 간 주과포(酒果脯)를 차려놓고 정성 들여 잔을 올렸다. 산소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산을 내려오는데 오랜 세월 묵힌 묘소가 군데군데 방치되어 있었다. 아랫대가 절손이 된 경우도 있겠지만, 자손들이 지금 이 시간에 자가용을 몰고 여행을 즐기거나 자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씁쓸해졌다.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볍고 후련하였다. 다리를 절며 묵묵히 따라 내려오는 아내의 땀에 젖은 얼굴이 석양에 발그레 물들여져 사랑스러웠다. 산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앉는 늦은 가을날의 해 질 녘, 바삭바삭 밟히는 낙엽이 포근했다.

내년에도 또 다음 해에도 나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내 육신이 정신의 의지를 따르지 못할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하여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마음속으로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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