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이문재의 '화전'

와서들 화전하여라

이문재의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치며/불, 불 질러라, 불 질러 한 몇 년 살아라.//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 버렸으니/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와서 불 질러라. 불(이문재, '화전'(火田) 전문)

하늘이 하얀 날은 해가 들지 않아 좋다. 어두운 내 모습에 오히려 빛이라도 나리면 처량할 터. 서로 찌푸린 표정이라도 마주 볼 수 있음에 기뻐하기로 한다. 그렇게라도 웃기로 하자. 어차피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한 내 젊은 날들이었으니. 난 잡목 우거진 고랭지에 서서, 와서 불 지르라고 목소리만 높일 뿐. 눈물 나게 맑은 아침. 신기하게도 하늘은 하얀 색깔로 덮여 있다. 기차를 마냥 바라보다가 왈칵 눈물이 솟아 흐려져 가는 철로를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가 아직 있는지 몰라. 그냥 걷다 보면 어느 하늘 아래 바다도 나올 터이고 그 이전에 눈부신 태양 아래 숨을 쉬는, 그래 나처럼 숨을 쉬고 있을 나무를 만날 수 있을 테지.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혼자라는 사실이 싫다고 내게 가지 말라 하면 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지켜줄 수 있다는 게 좋아 몇 날이고 머물다 보면 다시 그리워질 테지. 내 사랑도, 우정도, 미움까지도 그리워져 울어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난 여전히 잡목 우거진 고랭지인걸.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세상의 변화가 아직까지는 일상 가까이에서 체득되지 않는다. 새벽에는 여전히 청소로 바쁘고,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일상의 공간은 여전히 쌓인 업무로 무겁다. 흐릿한 창 너머로 겨울의 풍경이 스산하지만 절대 납득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은 분명하게 세상에 그 속살을 드러냈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괜찮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괜찮지 않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조직의 논리에 의해 해변에 쓸려온 미역줄기처럼 변방으로 쓸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찾아온 아름다운 공동체의 세상. 최소한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하는 말이 같은 세상이었으면.

이문재는 말했다. 자신의 시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면 자신의 시와 삶이 마침내 닿아야 할 곳은 '농경공동체에 대한 유전자적인 그리움'이라고. 2007년에 나온 '마음의 오지'에 실린 시편들은 그러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고전적인 공동체 문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문명의 이기로 가득하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생명을 파괴하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가는 화전, 지금은 화전의 시간이다. 문제는 화전의 대상이 바로 내 몸이라는 점이다. 가뭄으로 말라 있고,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한 내 몸이다.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와서 불 질러라. 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제발 나의 후회들, 나의 부끄러움들이 만든 자리에 화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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