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시 안과라 모든 연령대 돌봐야
진단'검사장비 또한 종합병원 수준
"대형병원 가기 전 마지막 단계죠"
둘째 아이 뇌성마비 장애 계기로
장애인단체 후원'의료봉사 나서
"성인 장애인 재활시스템 만들고파"
지난 15일 오전 찾은 포항 영동안과. 진료실 바깥에는 각종 진단'검사 장비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꽤 많았다. 이우석(53) 포항 영동안과 원장은 "진단 장비를 포항에서는 거의 대학병원급으로 갖추고 있다"고 했다. "환자들이 타지역의 대형병원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 우리 병원이에요. 진단받은 내용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죠." 그는 "그래서 환자들의 진료 대기 시간도 비교적 길다"고 했다. "안과 특성상 여러 가지 검사를 해야 하니까요. 환자들이 오래 기다릴까 봐 일할 때는 좀 급한 편이에요."
급하다는 성격과 달리 이우석 원장은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투로 성심껏 대답했다. "환자 입장에서 얘기하고 열심히 들어주자는 생각으로 해왔던 것 같아요. 환자들도 그런 점들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진료전달체계의 마지막 관문
이 원장의 고향은 포항이다. 하마터면 그는 북한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열다섯 살이던 그의 아버지가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지 못했다면 그대로 북한에 남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열차 기관사로 일하던 할아버지는 포항에서 살다가 좌천돼 함경북도에서 머물렀다. 해방 후에도 북에 머물던 가족들은 1'4후퇴 때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포항은 낯선 고향이다. 부모님의 교육열 덕에 그는 대구와 포항, 서울을 오가며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겼다. 또 12세 때 서울로 가 중'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졸업했고, 계명대 의과대에 진학한 후에야 대구로 왔다. "대구로 온 뒤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친구들도 다 서울에 있었고, 학교 선후배도 거의 없었고, 외롭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그는 "전공의를 수료한 뒤에도 포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솔직히 대학에 전임요원으로 남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었어요. 포항 선린병원에 1년만 있자고 왔는데 후임자가 없어서 3년을 머물렀고, 1998년 그냥 고향에서 개원했죠." 유년 시절의 친구가 없다는 게 아쉬워 그는 포항에서는 이사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추억'이라는 자산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원장의 아버지는 1997년 64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매일 병원에 있으면서도 당신 건강을 잘 돌보지 못하셨어요. 가족들과 시간도 많이 보내지 못했고요. 그래서 전 병원도 공동개원을 하고 지난 2005년엔 미국 존스홉킨스대병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1년 동안 머물렀어요. 학문적인 목표도 있었지만 가족들과 여행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컸죠."
그는 "소도시에 있는 안과는 모든 연령대에 걸쳐 안과질환을 봐야 한다"고 했다. "저희 병원이 포항에서 진료전달체계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안과질환을 치료해주고, 해결이 안 되는 질환은 대학병원에 직접 예약해주고 진료한 결과를 전달해서 환자가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료전달체계의 한 축입니다."
◆장애 있는 아이가 봉사활동의 원천
이 원장은 둘째 아이를 '우리 집 스마일'로 부른다. 그는 스스럼없이 "둘째 아이에게 중증 장애가 있다"고 했다. 아이는 심한 뇌성마비로 스스로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쯤 됐을 때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에는 미국에 있는 유명한 뇌성마비 어린이병원에 가서 한 달 동안 검사를 받기도 했어요. 나중에는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죠."
그는 아이를 데리고 쇼핑센터에 자주 간다. "사실 갈 곳이 별로 없어요. 활동하기도 불편하고. 쇼핑센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아이가 사람들을 보면 얼굴이 많이 밝아져요.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고 밥도 먹고 쇼핑도 하죠."
그는 아이가 각종 장애인 단체를 후원하고, 국내외 의료봉사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1995년 아이를 데리고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소아장애전문병원에 갔어요. 그곳에 두 달 동안 머물렀는데 현지 한인 성당에 있는 분들이 정말 많이 보살펴주셨어요. 그때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마음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그가 처음 시작한 봉사는 울릉도 의료봉사였다. 그는 14년간 매년 울릉도를 찾아가 무료 진료를 하고 약품도 지원했다. 안과 NGO인 '비전케어서비스'에서 활동하며 중국에서 두 차례 무료 백내장 수술봉사도 했다. 지금까지 그가 무료로 수술해준 이들만 200~300명을 헤아린다. 경북도의사회 캄보디아봉사단장으로 세 차례나 캄보디아를 찾아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다. 지난 2014년에는 작고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의 요즘 관심사는 성년이 된 장애인의 재활시스템이다. "아이가 내년이면 특수학교를 졸업하는데, 중증장애인이 갈 수 있는 시설이 거의 없어요. 기존 시설에 후원해서 성인이 된 장애인들이 머물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아이가 주변의 도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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