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현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일었다. 먹는 것과 숨 쉬는 것, 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모든 삶에 의심이 생겼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걸까. 두려웠다. 막막했다. 오래된 병이 서서히 뼈와 살에 깃들 듯 내면이 조금씩 분열하고 있었다. 가족을 사랑했지만 버거웠다. 허무했고 어디론가 내달리고 싶은 격정이 들끓었다. 너무 빠듯하고 조급했다. 무언가를 빨리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삶의 여유를 잠식했다. 솔직하게 이빨을 드러내는 감정에 적잖이 당황했다.
마흔에 찾아온 몸살은 낯설고 지독했다. 밥벌이의 절박함, 돈에 휘둘리는 사람들, 나도 똑같았다. 익숙해진 채, 꿈도, 희망도 뒷전으로 밀쳐두고 서서히 잊고 있었다. 무기력한 삶은 괜찮은 척하는 나를 거침없이 공격하고 흔들어댔다. "엄마는 꿈이 뭐야?" 아이의 질문에 서러우면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밀쳐둔 꿈에서 오래된 냄새가 났다. 온몸의 진액을 쥐어짜며 지독하게 앓았던 꿈, 거짓과 계산 없이 좇아가던 꿈을 나는 언제부턴가 묵인했고, 치밀하고 정확하게 현실에 스며들어 생존해야만 했다.
구멍 뚫린 가슴으로 닿을 듯 말 듯한 꿈들이 들락거렸다. 도시의 최면에서 눈을 떴다. 도시는 더 이상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 일었다. 헤매기 시작했다. 꿈도 야망도 기계화시키는 허무한 도시, 더는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작정 연고도 없이 동해를 건넜다. 그러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나와 그런 엄마를, 아내를, 며느리를 애써 이해하려 했던 가족들.
울릉도에 정착한 어느 밤, 마음이 가벼워지고 비로소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에 투영된 민낯이 낯설지 않았다. 미친 듯 걷고, 혼자 말을 하고, 비를 맞고, 그리고 웃었다. 가슴 밑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유연하고 투명한 태초의 웃음. 그리고 힘겹게 달려온 시간을 기억하며 꿈을 꾸었다. 바다를 끼고 몽환적이고 신기루 같은 꿈을. 성큼성큼 꿈속으로 걸어가 묵은 숙제를 하듯 몰아의 경지를 탐닉했다. 요정이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알 수 없는 전설의 사회에서 공주가 되거나,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무사가 되기도 했다. 사무치고 사무쳐 가슴 서늘한 비움의 사색 속에 나는 오늘이 진정 아름다웠다.
허황한 꿈이면 어떠랴. 주어진 몫의 오늘이 기묘하고 애틋하게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나는 오늘도 꿈을 향해 고독하지만 의연하게 순례의 길로 들어선다. 이상향이 존재할 것만 같은 간절한 오늘. 너른 바다를 끼고 나는 또, 현재진행인 꿈을 향해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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