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포위당한 TK

현실 정치에서 충청도는 큰 각광을 받지 못했다. 영호남 지역주의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서 충청도는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멍청도' '핫바지' 등으로 폄하되기 일쑤였고,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선 적이 없었다.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활약했지만 권력의 최종점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던 충청도가 어느 순간 선거 때마다 캐스팅보트를 쥔 화려한 백조로 부활했다. 소위 '중원싸움'으로 불리는 선거철의 충청도 쟁탈전은 이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자유민주연합이 쇠퇴한 후 특정 인물과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는 특유의 표심이 빚어낸 현상이다. 선거철마다 보수와 진보 양쪽은 맹주 없는 충청 민심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충청도는 이런 기회를 십분 활용해 세종특별자치시와 각종 국책 연구기관 등을 유치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중 가장 잘 나가는 동네가 됐다. 박근혜정부의 주류들이 충청 출신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내세워 정권 재창출에 나서려는 전략을 세웠던 것도 충청 표심을 잡으면 정권을 연장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대구경북(TK)은 보수 정당의 중심 지역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하고, 지역민의 성향 자체도 보수적이다. 거기다 대형 사고가 겹치면서 외지인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더 컸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잇따라 배출하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이어 법적 처벌 가능성까지 나오면서 TK 민심은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졌다. 박근혜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라는 자부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노년층에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심이 여전하지만 청장년층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전후로 TK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보수=영남'에서 TK와 부산경남이 서서히 정치적으로 분화되면서 이제는 '보수=TK'로 외톨이가 됐다. 정치적으로 진보와 중도, 중도 우파 세력에게 TK가 포위되는 양상이다. 이런 구도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부정적인 지역 사회 이미지를 보수의 중심 세력이라는 정치적 결집력으로 그나마 버텼지만 앞으로는 이마저도 쉽지 않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TK의 정치적 방패막이까지 무장해제당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의 유력 대선 주자들도 견고한 보수 성향인 TK 민심을 내심 부담스러워한다. 중도 우파와 중도표를 얻으려면 당분간 TK와 거리두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국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른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국정 농단에 책임이 있는 몇몇 양아치 친박(친박근혜)을 빼고 나머지는 계(系'정치적 계파)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상가에서 만난 한국당의 한 국회의원은 "당내 친박들은 지도부에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한국당은 친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당의 지도부와 대선 주자 모두 TK가 지금까지 지지했던 친박계와 거리두기에 골몰하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TK 민심은 여전히 박 전 대통령과 친박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보냈던 무한 애정을 한순간에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상실감에 빠진 TK 민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활개를 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보수와 수구는 구별돼야 한다. 전통과 애국심을 중시하는 보수와, 과거에 대해 맹목적 추종만 하는 수구는 엄연히 달라야 한다. 자칫 TK가 수구 세력으로 비칠까 두렵다. 보수의 핵심 가치는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무다. 도덕적 책무는 외면한 채 정치적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충청도는 참고가 될 만하다. TK는 보수인가, 수구인가. 우리 스스로 답해야 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