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희소성에 대한 상념

나이 육십을 앞두고 뜻하지 않게 주말부부가 되었다. 아내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네요'라고 지인들이 부러워한다니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 명의 식구가 아옹다옹 살다 부부 둘이 남았는데, 그나마 주중에는 아내 홀로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우리 집 사람 수가 그만큼 희소해졌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할수록 희소성(scarcity)은 커진다. 희소한 물건이나 서비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제 용어인 희소성을 사람과 연결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향한 사람들의 경쟁도 결국 자신의 희소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란 점에서 타당한 면이 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고 있지만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소위 '사'자 직업은 수를 제한하며 희소가치를 유지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려는 것도 미국 내 일자리의 희소성 유지가 목적이다. 모두 제도적 희소성 유지 장치들이다.

공짜로 얻는 자유재도 희소재로 변하기도 한다. 필자의 중'고교 시절만 해도 물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생수는 이제 완전한 구매품이 되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환경에 부담을 주는 경제활동이 지속한다면 공기도 희소재가 될지 모른다.

자유재가 희소재로 바뀌듯, 희소재도 수가 늘어나면 자유재로 바뀔 수 있다. 2053년 지구촌 인구가 100억으로 늘어나면, 사람의 희소가치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실업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청년 실업률은 12%나 된다. 그럼에도 사람의 희소가치가 하락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가치, 인권은 실업률과 동등비교 대상이 아니다. 세상 만물은 그 수의 많고 적음으로 희소성을 판별할 수 있어도 사람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업률이 높다고 청년들의 몸값을 그들의 재능 가치보다 낮게 배분하려는 어떠한 사회적 합의나 관행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희소가치를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향하는 사람들, SNS 수다방을 찾아 정담을 나누는 동창생들. 그들은 경쟁보다는 사람들의 끈끈한 정(情)이 더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곳은 경쟁자가 아닌 이웃사촌이, 꿈으로 부풀었던 청춘의 열정이 넘치는 곳이다.

주중 저녁, 홀로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여유롭다. 나 홀로 방에서 나를 본다. 거울 속에 비친 하나뿐인 나, 천하에 하나뿐인 희소한 존재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충분히 가치 있는 얼굴이다. 이렇듯 사람의 가치는 수의 희소성으로 재단될 수 없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곳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귀한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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