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곳, 내 마음의 안식처] (6)정호승 시인-대구 범어천 영주 부석사

어린 정호승을 키운 대구 범어천.
어린 정호승을 키운 대구 범어천.
중년 정호승을 무르익게 한 영주 부석사.
중년 정호승을 무르익게 한 영주 부석사.

#벗에게

내 죽어 범어천 냇가의 진흙이 되면

그 흙으로 황소 한마리 만들어

가끔 그 소를 타고 우리집에 가주렴

우리집 꽃밭에 수선화는 아직 피는지

남향받이 창가에 놓아둔 춘란이

아직도 꽃을 피우지 않고 애태우는지

대문 곁 우물가 높은 감나무 가지 위에

새들은 날아와 나를 기다리는지

병든 노모는 오늘도 진지를 잘 드셨는지

가끔 가서 살펴봐주렴

내 죽어 범어천 개울가의 진흙이 되어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젊은 느티나무에게 고백함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젊은 느티나무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무량수전 무거운 기와지붕을

열여섯개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선 까닭이

천 년 전

느티나무가 사랑했던 모란 때문임을

늦어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오늘 홀로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느티나무 무늬로 남은 모란꽃을 쓰다듬어봅니다

오늘부터 다시 천년 동안

무량수전 열일곱번째 배흘림기둥이 되어

당신을 받치고 서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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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 같은 범어천… 어릴적 놀이터이자 방과 후 학교였죠

#나뭇가지로 글 쓰면 국어시간, 물고기·벌레 만날 땐 자연시간

#엄마 같은 부석사… 자신 낮추어 절하는 영혼의 공간이죠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소백산과 아미타불서 안식 찾아

"그러니까 문화예술인들의 힐링 공간을 독자와 공유하자는 겁니다. '내 마음의 안식처'로 꼽을 만한 곳을 한 군데만…."/"안식, 쉼, 쉼이라…."

시인 정호승은 두 군데를 알려줬다. 대구 범어천, 영주 부석사. 하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었고 또 하나는 청년기 이후 줄곧 그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었다.

대구 범어천은 어머니의 탯줄과 같은 곳이라 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부터 12년간 살았다. 시인이 살던 곳은 지금의 범어3동 주민센터 주변이었다. 지금은 청구네거리지만 그 당시엔 삼거리였다. 현재의 신천시장 방면으로는 모두 집이고 과수원이었다. 중앙상고(지금의 중앙고) 정문에서 신천시장 앞까지 이어진 범어천은 시인의 놀이터이자 방과 후 학교였다. 맨땅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면 국어시간이었고 물고기며, 밭작물이며, 벌레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만날 땐 자연시간이었다.

시인의 자양분이던 범어천은 그러나 곱게 지내지 못했다. 1980년과 90년대를 지나며 범어천은 악취로 민원이 들끓는 곳이었다. 도시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받아내는 시궁창이었다. 최근에야 범어천은 보기 좋게 부활했다. 사람들이 다시 찾는 곳이 됐다. 대구의 내로라하는 맛집들이 '범어천먹거리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늘어섰다. 범어천은 그렇게 또 배출구가 됐다. 취업의 문, 승진의 문,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해 낙담한 이들이 밤이면 술잔을 기울인다.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에도 이곳을 떠올리며 쓴 시가 더러 있다. 시인이 거절한다는 희망, 그 밑바닥에는 지독한 절망이 있듯.

정호승 시의 시작이 범어천이었다면 농익힌 곳은 영주 부석사다. 머리가 굵어진 그를 깨우친 곳이다. 시인은 이곳 역시 '그리운 어머니' 같은 곳이라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속 안식처가 있을 겁니다. 그리운 어머니가 계시듯이. 제겐 영주 부석사가 그렇죠. 마음속의 사찰이죠. 특히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소백산의 모습, 아미타불을 보는 것에서 안식을 찾지요. 자신을 낮추어 절하는 영혼의 공간이기도 하고."

부석사는 정호승 시인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덕분에 더 유명한 곳이다. 순례 재연 행사처럼 적잖은 이들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선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팔이며 등을 댄 흔적이 배흘림기둥 곳곳에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악수를 청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인 노인을 떠올렸다. 시인도 거들었다. 그의 시 '젊은 느티나무에게 고백함'을 읽었다면 배흘림기둥에 자연스레 손이 또 가게 돼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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