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세상이 온통 봄을 맞아 들썩이는데, 너는 무슨 일로 며칠씩 집안에 틀어박혀 외롭게 지내느냐고 가볍게 톡톡, 묻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받아둔 원고 청탁서가 한동안 나를 꼼짝없이 묶어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루 이틀 만에 끝이 날 수 있는 글 노동이 아닌데 말이다. 아! 이토록 어리석은 내 마음도 모르고 봄날은 자꾸 가려고만 한다.
정해진 약속 없이 혼자만의 외출에 새로운 매력을 느낀 것은 얼마 전부터다. 친구를 불러내어 만날 시간, 장소, 먹을 것까지 정하다 보면 이래저래 짧은 하루가 후딱 갈 것 같아 그저 편한 신 신고 가방 하나 메고 나는 가끔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 푸른 시간이 곳곳에 배어 있는 익숙한 거리, 반월당에서 동성로를 향해 걷는 길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이제는 단어조차 생소한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에 미국 항공 우주국(NASA)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숨겨진 인물들' 어쩌면 '숨겨진 천재들'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흑인 여성 3인의 활약과 그녀들의 열정을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낸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보았다. 성차별, 인종차별, 거기에 신분과 학력차별까지 겹겹의 장애를 뚫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인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캐서린 존슨은 애초에 그녀를 무시해서 단순히 계산만을 하도록 하는 선임연구원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해서 누구도 찾지 못한 답을 찾아낸다. 군데군데 가려진 숫자와 부족한 정보만으로 어떻게 이런 결과에 이르렀는지 의구심을 보이는 최고 책임자에게 "행간을 읽으면 내용이 보이죠"라며 차분히 설명을 더한다.
행간이란 '행과 행 사이'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더라도 주인공의 슬기로운 설명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것은 허를 찌르는 대답인 동시에 한 편의 시(詩) 속에 숨겨둔 행간의 의미보다 더 진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NASA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흑인 여성 최초로 NASA 엔지니어의 꿈을 이룬 매리잭슨. 영화 속 그녀들처럼 사회적으로 잘못된 편견을 용기 있게 바로잡아 나가고 자신을 보호하려면 무엇보다 각자의 마음 근육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 힘으로 지혜로운 심안(心眼)을 가져 깊숙이 숨어 있는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기에 좀 더 깊어져야 한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봄 햇살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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