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누가 독립운동하랬냐

"짐(朕)은 다시 말하지 않겠으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500년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눈치를 보며 조칙(詔勅)이라는 임금의 말을 백성들에게 여럿 내렸다. 군대를 없애라는 조칙도 있다. 1907년 7월 31일이다. "우리 군대는…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다.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일제의 침탈에 순수 민병(民兵)인 의병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8월 1일 군대 해산으로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해산 군인까지 더해 전국이 의병 '소요'로 들끓자 9월 18일 조칙을 또 내렸다. "무장을 풀고 집에 돌아가서… 부모 처자와 함께 태평스러운 행복을 함께 누릴지어다"며 타일렀다. 의병을 해산하고 일본군과 싸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13도 의병이 이어지자 12월 13일 '반란으로 소요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백성'과 '무도한 백성'에게 귀순(歸順)의 조칙을 다시 내놓았다. "날씨는 춥고 해가 저물어 얼음과 눈 속에서 허덕"이느라 "부모는 동구에 나아가 울고 처자들은 배고파 울면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귀순하라 했다. 그러면서 "순종하지 않는 자는 법에 의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겁까지 줬다.

이토 통감의 지시(?)에 순종한 순종의 왕명에도 말발이 먹히지 않자 일제는 앞선 화력과 대규모 병력, 그동안 기른(?) 한국인 앞잡이를 내세워 대토벌에 나서 완전 진압을 눈앞에 두었다. 일제는 순종의 이용 가치도 떨어짐에 따라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통째로 삼켰다. 경술국치 패망, 흑역사(黑歷史)의 시작이다.

그런데 지금, 대구에서는 순종이 부활하고 있다. 대구 중구청이 지난 2013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70억원을 들여 순종을 기리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다. 이는 순종이 1909년 1월 7일 첫 방문에 이어 부산과 마산을 둘러보고 12일 다시 대구에 들른 일을 기념해서다. 그러나 대구에 와서 순종은 '소요' 때문에 골치였다. 그래서 "지방 소요는 가라앉지 않고 서민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니 가슴 아프다"며 '난국을 구하려' 이토 통감과 남쪽을 둘러보고 있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순종의 대구 방문은 오히려 이토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 기회였다. 이토는 일본 기녀를 끼고 놀았고 일장 연설의 호기까지 부렸다. 당시 대구 일본인들은 환호했고 숙소에 이르는 길을 화려한 등불로 장식했다. 대구에서 맘껏 부린 이토의 호기는 거기까지였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손에 의해 중국 하얼빈에서 악행의 심판을 받아서다.

이런 흑역사 기리기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대구에서 참으로 믿기 어려운 기막힌 일이 지난주 매일신문에 보도됐다.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망한 나라를 구하겠다며 젊음을 내던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이상정 장군 손자의 힘든 삶이다. 일흔을 눈앞에 둔 손자 이재윤(69) 씨. 그는 1950년 3세 때 소아마비로 장애가 된 불편한 몸으로 월세방에서 힘겨운 삶을 버티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특히 그의 삶이 아린 것은 마침 대구 도심에서 할아버지 4형제(상정'상화'상백'상오)와 이들을 뒷바라지했다는 종증조부 이일우 등 소위 이일우 집안을 일컫는 '이장가'(李庄家)의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가 열리는 터여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올 4월은 정부가 할아버지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아 온 나라에서 기리는 달이지 않은가.

70억원짜리 '순종황제어가길' 조성 사업으로 이일우가 운영한 우현서루 터와 여러 곳을 새 단장하느라 돈이 아낌없이 쓰이고 있다. 이장가 사업 홍보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는 누구를, 무엇을 위함인가. 그나마 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 어제 손자에게 성금을 전달했다니 다행이다. 이것만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가슴 답답한 현실이다. 박중양과 이완용이 "그래, 누가 독립운동하랬냐"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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