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녀자/박영자 지음/앨피 펴냄
북한 여성들에게는 2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억척스럽다 싶을 만큼 생활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들이 가정에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일할 때는 억척스럽고, 남편이나 국가 앞에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책 '북한녀자'는 1945년 해방 이후 당 국가체계 수립부터 전쟁, 산업화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선군정치'시장화'3대 세습이 이루어진 현재까지 북한 젠더 시스템의 역사를 다룬다.
북한정권이 추진했던 양성평등 정책이 전쟁과 산업화, 경제난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젠더 위계'가 북한 사회에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북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집안일도 바깥일도 완벽해야 좋은 여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거대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생산과 권력을 주도했고, 사회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는 극복대상이 아니라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억척스럽고도 순종적인 '북한 여성의 모습'은 바로 이 역설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족과 사회 두 차원을 모두 중시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사회주의 정책 결정자들은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생산영역에서 여성 역할을 강조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생산성 제고를 목표로 이루어졌으면서도 구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내부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 요소들은 잔존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이라고 인식된 가사와 양육은 그대로 여성의 몫으로 남았으며, 밖에서 노동자 역할까지 중요한 비중으로 추가된 것이다.
품질감독원 출신 40대 탈북 여성의 증언은 북한 사회의 남녀 차별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집약해서 설명한다.
'남자들은 작업장에 나가면 일도 안 해요. 우리나라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건달기가 있나 봐요. 대한민국은 안 그렇다는데, 북한을 먹여 살리는 건 여자예요. 농촌에도 나가 보면 밭에서 일하는 건 다 여자들이고 남자는 한 명도 없어요. 남자는 싹 간부만 하고 건들건들 일도 안 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요. 일 맡기면 남자 맡긴 데와 여자 맡긴 데가 차이가 나요. 여자들은 딱딱 하라는 대로 하고, 빈틈없이 매끈하게 하잖아요. 남자들은 술이나 먹고 건들건들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책임자는 남자죠.'
◇가사와 노동에 시달리지만 만족도 높아
북한 여성들에게 가사와 노동은 '당연한 의무'로 인식된다. 부담이 크지만, 그럼에도 직장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남성(18.0%)보다 여성(37.1%)이 높다. 불만족 비율은 남성(37%), 여성(25.7%)으로 조사된 바 있다.
이 책은 그 이유로 '1960년대 중반 이후 남성은 군 복무에 많이 배치되고, 70년대 이후로는 여성이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여성이 사회노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화됐다'고 분석한다. 또한 간부와 지도원 자리는 대부분 남성들이 맡고 있어서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생활에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남성들은 여성보다 정치지향성이 강해 현장 노동보다는 정치 진출과 같은 정치관계를 더 중시하는 점도 남성이 노동에 불만을 많이 갖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김일성은 훌륭한데 간부들이 나쁘다" 믿어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북한 여성들은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김일성과 김정일(57%), 북한 주민(26%), 노동당 간부(9%), 정무원 간부(1%), 인민회의 대의원(1%) 순으로 답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대답 다음으로 북한 주민이 주인이라는 대답은 북한 주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있다는 말이며, 이는 김일성의 통치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김일성의 대중정치는 일관되게 간부를 비판하고, 대중을 치켜올리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대중정치 방식은 북한 주민들에게 노동자와 농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으며, 사회체제의 문제를 수령이 아닌 간부의 잘못으로 여기게 했다. 게다가 일반 주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간부의 잘못'을 수령이 나서서 해결함으로써 '대리만족'까지 시켜주었다.
까닭에 북한 주민들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간부들이 부패해도, 이는 김일성'김정일이라는 지도자와 별 상관이 없고, 지도자의 지시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한 '관료주의적 간부들의 잘못'으로 인식했다. 김일성의 대중정치는 한마디로 '책임 전가의 정치'였다.
◇사상 문제만 아니면 웬만해선 이혼 안 해
전통적으로 북한 여성들은 결혼조건으로 당성(黨性)과 출신성분을 중시했다. 당원이 정치사회적 지위가 비당원보다 높고, 물자공급 등 각종 혜택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관계의 덕목으로 꼽히는 효나 우애보다 사회적 덕목을 우선해 책임감과 충성심을 중요한 결혼조건으로 보았다.
1990년대 이후 식량위기로 생존 자체가 불안정해지자 북한 여성들이 선호하는 결혼 상대는 외화벌이, 상업관련 종사자, 운전사 등 생활필수품 구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이혼사유는 정치사상범, 간통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일 때를 비롯해 배우자 중 한쪽의 출신성분이 나쁜 것으로 판명됐을 때, 당성이나 가치관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한쪽 배우자가 계속 바람을 피우거나 폭력을 쓸 때, 자녀가 없을 때 등이다. 그러나 북한 여성들은 남편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이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재단사 출신 탈북 여성 강모 씨의 진술이다.
'사상문제만 아니라면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이혼을 잘 안 하려고 해요.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사회이고, 배급받기 위해서 직장에도 다시 나가야 하고, 살림도 혼자 해야 하고, 연탄 만들기, 거리청소 등 힘든 노동을 여자 혼자서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참고 살아요.'
북한 노동자와 사무원은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10~11시에 일과를 마칠 정도로 빡빡한 일정 속에서 살아간다. 농민들은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10~11시까지 강도 높은 노동과 다양한 학습회와 강습회에 매일 참석한다. 그만큼 빡빡한 일정에 갇혀 있기에 가족 구성원간 결속력이 낮고, 배우자에 대한 기대치도 낮다는 것이다.
이 책 '북한녀자'는 총 4부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제1부 사회주의적 근대와 젠더 전략은 ▷가부장제를 넘어 ▷성의 정치로 구성돼 있으며, 제2부 해방과 전쟁의 스펙터클은 ▷체제 수립과 젠더 형성 ▷전시 체계와 가국(家國) 일체화, 제3부 산업화와 젠더 위계의 제도화는 ▷젠더화된 산업과 노동 ▷생활세계의 침식 ▷젠더 위계와 정체성으로 구성돼 있다. 제4부 시장/선군/세습, 변화하는 젠더에서는 ▷사회변동기 시장과 젠더 ▷아래로부터의 젠더 전략 ▷김정은 정권의 젠더 프레임을 다룬다.
지은이 박영자는 숙명여대'성균관대'이화여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체제 및 젠더사 연구와 강의를 했다. 2013년부터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북한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 체제 변동, 균열과 통합 등을 연구하고 있다. 639쪽, 2만8천원.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