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5>-엄창석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장상만이 흙이 담긴 가마니를 밖으로 옮기면서 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게 우리 중에 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줄 거야."

구덩이 안에서 흙을 뒤집어 쓴 얼굴 하나가 불쑥 마구간 바닥으로 솟아올랐다. 그걸 보고 다른 이가 농담을 했다.

"두더지인 줄 알았잖아. 흐흐 노새가 빠져 허우적대면 어쩌지?"

둘러 선 사람들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구덩이 안에는 두 명이 들어가 있었다. 하나가 곡괭이질을 하면 다른 이가 흙을 가마니에 담아 위로 올려 보냈다. 계승을 허리를 굽혀서, 구덩이 안의 짙은 어둠과 진흙 덩어리 같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마구간 바닥 밑의 컴컴하고 은밀한 공간. 그것은 마치 암흑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사람들이 몸부림치는 이 도시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현재의 상황보다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몰랐다. 사실 달성회 회원 중에 형장으로 끌려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구성 철거 업자 살해 사건으로 몇몇이 조사받긴 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구금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젊은 장사꾼들은 미리 숨을 곳을 만들까? 그들은 도시 안에 이런 은신처를 몇 군데 더 꾸며놓았다. 왜 그럴까?

아마 도시의 절반을 점유한 일인 상인들이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파산시켜버릴 것이고, 그 파산 끝에 자신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태가 올 것이다, 하는 예감에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노새의 발밑에나 두어야 하는 그런 종류가 아닐까. 실제로 몇 년후 마구간 구덩이를 팠던 몇몇 회원들은 이 도시에서 결성한 대한광복회의 조직원이 되었고 이 마구간과 더불어 도시의 몇몇 은신처도 절묘하게 활용되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것은 막연한 예감이었고 터무니없이 휘젓다가 사그라지는 불안감이어서, 구덩이를 파면서도 사내끼리의 농담이 끊이지 않았다. "야, 너 구멍 잘 파네? 아주 요령이 있어." 하나가 안에다 대고 히죽거렸다. "흥, 원래 사내는 구멍을 좋아하는 거야." "앞으로 이 방 사용할 놈은 방값을 톡톡히 내야 돼." "흐흐흐 그렇지. 노새 밑에서 일을 치르니까 짐승 같은 맛을 즐기게 될 거다."

이런 와중에서도 계승은 간간히 애란을 생각했다. 그녀가 어느 거리를 지나가지 않을지, 광문사에 언제 신문을 사러 올지, 드물게 마주치는 인력거에 혹 그녀가 타고 있지 않는지. 계승의 머릿속에는 그날, 폭설 속에서 다람쥐처럼 달리는 인력거에 타고 있던 그녀가 자꾸 떠올랐다. 어느 일본인 요릿집에 갔을 거다. 그들의 더러운 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비싼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겠지. 얼굴을 숙이고 자색 치마 속으로 다리를 모은 채, 사선으로 긋는 함박눈을 가슴과 다리에 맞으면서도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계승은 말할 수없는 질투와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르기로 한 계획은 다시 연기됐다.

1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눈은 그쳤지만 이어진 폭설로 곳곳에 눈 무더기가 쌓였고 공기는 무척 습했다. 불을 지르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비밀스런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게 갑자기 광문사에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광문사 부사장인 서석림이 낙동강으로 여행을 가는데 계승에게 자신과 동행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즈음 계승은 인쇄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 채자를 하는 눈이 빨라졌고, 조판 작업하는 손도 꾸물대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건지 교정쇄를 들여다보는 데는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글자에 대한 조심성이 커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채자와 조판은 환한 낮 시간에 해야 하지만 교정쇄를 검토하는 것은 오히려 밤이 편했다. 계승은 다른 일이 없으면 모두가 퇴근한 뒤에 혼자 인쇄실에 남아 석유등을 켜놓고 교정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석림이 깊은 밤에 인쇄실에 들렀다. 계승이 중등(中等) 생리학(生理學)의 교정쇄를 살피다가, 지겨워 보성관에서 간행된 월남망국사를 뒤적이던 참이었다.

서석림은 밤늦게까지 그가 혼자 인쇄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계승도 늘 하인을 데리고 다니던 서석림이 이 밤에 광문사에 혼자 왔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를 눈여겨보았네."

서석림이 인쇄실에 서서 계승이 펴놓은 월남망국사에 눈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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