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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노병, 애타게 찾았는데… 소년은 만날 수 없는 곳에…

"지난 1992년 돌아가셨다" 박영섭씨 동생 매일신문에 알려와

박영섭 씨의 동생 박광섭 씨가 20일 대구 한 카페에서 형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매일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박영섭 씨의 동생 박광섭 씨가 20일 대구 한 카페에서 형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매일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6'25전쟁 때 미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노병의 '한국인 소년 찾기'(본지 6월 17일 자 2면 보도)가 안타까운 결론으로 이어질 공산이 커졌다. 유진 메클링(93) 미군 예비역 대령이 동고동락했던 세 소년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박영섭(1935년생) 씨가 20여년 전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박 씨의 동생, 광섭(68'대구 수성구 시지동) 씨는 20일 매일신문에 친형인 영섭 씨가 지난 1992년 작고했다고 알려왔다. 광섭 씨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영섭 씨는 메클링 대령의 '하우스보이'(허드렛일을 도맡던 소년)로 일했다. 광섭 씨는 "미군이 단순 심부름 등을 위해 개인적으로 고용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하우스보이라고 불렀다"며 "당시 집이 수성교 인근에 있던 수성극장 근처여서 매일 K2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오가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형님은 대구상고 야간반 수업을 들으며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광섭 씨는 7남매 맏이였던 영섭 씨를 '왜소했지만 깔끔하고 단정했던' 맏형으로 추억했다. 광섭 씨는 "신문을 보니 메클링 대령이 한국인 소년들에 대해 '모두 양자로 삼고 싶을 만큼 착했다'라고 했던데 형님과 메클링 대령은 열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형님이 어렸을 때는 눈에 띄게 키가 작아 아들 뻘로 보였을 수 있다"며 웃었다.

광섭 씨는 한국을 떠난 지 60년이 넘어서까지 형을 기억하고 찾으러 온 메클링 대령이 더없이 고맙다면서도 만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안타까움도 짙게 드러냈다. 그는 "형님의 '럭키'라는 별명도 그분이 지어준 것으로 안다. 왜 그렇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행운이라는 좋은 뜻을 담은 것을 보면 좋게 봐준 것 아니겠느냐"라며 "형님도 살아계셨다면 참 반가워하셨을텐데"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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