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봄밤

# 봄밤

서영처(1964~ )

수상쩍은 기미가 몰려온다

최루가스처럼 묻어온 꽃가루들이

다투어 내 몸을 빌리려는 것

폭도처럼 산을 내려와

밤에 더 기승을 부리는 가려움

붉은 삐라를 살포하고

봄은 나를 짓밟고 간다

꽃 진 자리 오래도록 얼룩얼룩하다

―시집 『피아노악어』(열림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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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봄, 꽃등을 밝힌 봄밤이다. 하지만 최루가스처럼 꽃가루가 묻어오고, 폭도처럼 가려움이 기승을 부리고, 붉은 삐라 뿌리며 나를 짓밟고 가는 수상쩍은 봄이다. 천지 사방에 낙화로 얼룩진 봄밤이다. '꽃가루'가 '최루가스'로, '가려움'이 '폭도'로, '낙화'가 '붉은 삐라'로 각각 비유되고 있는 '봄밤'은 '폭력'이나 '억압'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봄밤'은 내 몸속 침입자인가, 밤의 폭도인가, 나를 붉게 물들이는 불온한 사상범인가?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요즘, '꽃'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나를 짓밟는 '봄밤'은 아무래도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저지르는 성범죄자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터! 따라서 '봄밤'을 노래한 이 시는 미투 운동 한참 이전에 미투를 일찌감치 선언하고 폭로한 선구적 작품이 아닐까?

실려 오는 꽃향기에 마음 설레는 봄밤, 꽃잎 벙그는 소리에 창문 열어젖히는 봄밤, 꿈이 부풀 대로 부풀어 겨드랑이에 날개 돋는 봄밤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봄이다. 어이쿠, 다투어 몰려오던 하 수상한 봄이 꽁무니 빼고 저만큼 달아나는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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