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자치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간 엄태항(70) 봉화군수. 대구경북 최초로 징검다리 4선 군수에 당선된 그는 4번의 선거를 모두 무소속으로 당선돼 지역 정당의 두터운 공천벽을 허물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은 32살때부터이다. 봉화초·중·고등학교와 중앙대 약학대를 졸업하고 봉화읍내에 엄 약국을 개설, 약사로 활동하면서부터다.
그는 약사회장직을 맡아 오지마을 곳곳을 돌아 다니며 주민들에게 무료투약 봉사를 했고 1984년 봉화JC 회장과 1985년 봉화군조기축구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주민들과 투터운 인연의 고리를 맺기 시작했다.
엄 군수는 "당시는 의약분업 전이라 무약촌들이 많았다. 10여 명의 약사들과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무료 진료·투약사업을 시작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산간오지 마을 주민들까지 인연을 맺게 됐다. 성공의 비결은 오직 성실함이다. 개인적인 사조직은 없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인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저를 기억해주고 있다. 나의 재산이다"고 했다.
그가 지역발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봉화 번영회 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이다.
농촌의 심각한 교육문제와 이농현상을 알게 된 그는 지역발전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1990년 42살되던 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온 펜실베니아 대학으로 유학도 떠났다. 그런 그가 1991년 지방의회 선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해 경상북도 도의원선거에 출마해 초대 경상북도의원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엄 군수의 정치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1995년 6월 초대 봉화군수에 당선됐고 연이어 2대 봉화군수에도 당선됐다. 3대는 건강상의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고 다시 4대(재보궐 선거) 봉화군수로 당선됐다. 5대 군수선거에서 낙마한 엄 군수는 초야에 묻혀 농사와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7대 봉화군수에 도전, 무소속 4선 군수란 신화를 썼다. 한편으로는 오뚝이 같은 인생이다.
"허수아비도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경북에서 지역정당의 벽을 허물고 4번씩이나 무소속으로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엄군수는 초대, 2대 봉화군수로 지내면서 전국 최초로 송이·은어축제를 만들었고 선진농업기반을 조성했다.
특히 자조협동사업(군이 레미콘과 철망 지원, 부지와 인건비는 주민부담)을 착안, 전국에 확산시켰고 이태리 남티롤에서 수입 금지된 M9 사과(인건비는 1/5로 줄고 생산량은 3배 증가) 대목 1만 그루를 사서 몰래 가방에 넣고 들여와 증식시켜 전국에 키낮은 사과원을 보급, '엄익점'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43년 된 낡은 군청사를 옮기면서 사업비 400억원을 절약하기 위해 개발현장에서 발생한 사토와 골재를 팔아 200억원 이상의 수익을 창출했다. 이 때문에 감사원으로부터 편법이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예산 절감의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아 경영행정 대상(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3선 시절에는 청량산 하늘다리건설, 은어테마공원조성, 국립백두대간 수목원(사업비 2천300억원)을 유치했다.
'전원생활 녹색도시 봉화'를 군정 목표로 정한 엄 군수는 "지방이 소멸되지 않도록 저출산 고령화를 극복해 소득이 보장되는 삶이 있는 고장을 만들겠다"며 "주민 소득 창출을 위해 봉화우선주의 행정을 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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