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서 핵무기를 몰아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4일 오전 대구 수성구 모산학술회관을 찾은 홍윤희(89) 씨는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파란만장했던 옛 이야기를 시작했다.
1950년 스무 살이었던 그는 국군 간부후보생으로 입교를 기다리다 6·25전쟁을 맞았다. 한강대교가 폭파되며 서울을 떠날 수 없게 된 그는 목숨을 구하고자 북한 인민의용군에 가담했다. '서울대학교 학생 홍관희'로 신분을 속이고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그는 우연히 북한 인민군의 '9월 대공세' 계획을 접했다.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심한 시각,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죽음을 각오하고 남쪽으로 달렸죠. 오전 6시쯤 국군 진지에 닿아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보고했습니다."
국군과 UN연합군은 홍 씨 덕분에 북한 인민군의 상세한 공세 계획과 부대 배치를 파악했다. 이에 힘 입어 9월 3일 시작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영웅적인 행동이었지만 이후의 삶은 기구했다. "9월 11일쯤 갑작스럽게 숙소에 헌병이 들이닥치더니 모질게 때리고 협박했습니다. '북한의 간첩임을 실토하라"고 강요했죠."
억울했던 그는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군사법원은 홍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감형돼 1955년 출소했지만, '이적 행위자'라는 주홍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1973년 정부가 좌익 경력자를 감시하고 구금할 수 있는 '사회안전법'을 만들자, 가족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그는 1989년 '북한의 9월 대공세에 대한 정보를 '인민군 소좌 김성준'이 제공했다'고 적힌 책을 읽고 분개했다.
이후 20년에 걸쳐 명예를 회복할 증거를 수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63년만인 2013년에야 비로소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6·25 전쟁사의 권위자인 로이 애플먼이 기록한 '애플먼 컬렉션' 속에서 '홍의 정보'(The Hong's Information)라는 문서를 찾아낸 게 결정적이었다. 이 문서에는 "한국 육군 간부후보생 '홍'이 북한 인민의용군에서 귀순, 총공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오랜 세월, 누명으로 고통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조국을 사랑하며, 남은 생은 조국의 평화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올 들어선 비핵화와 개혁·개방에 관한 편지를 20통 이상 작성해 북한 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 내가 겪었듯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 있는 전쟁은 더 이상 안됩니다. 미국에 돌아가면 뜻 있는 사람들과 계속 한반도 평화 운동을 펼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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