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남매지 이자규(1953~ )

수백 살 먹은 오라버니가 불러서 가면 나는 배고픈 노파이고 맨발의 가수이다 내가 발목 담그고 휘저으면 오라버니는 껄껄껄 웃는다 오라버니 앞에서 나는 병든 아가이고 거짓말쟁이다 오라버니 앞에서 나는 개망나니 누나이고 마지막 잎새이다
그 못가에 앉으면 지난날 바보 천치의 생이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서도 아프지 않다 못은 내 마음 떨어져 나간 모서리를 끼워 맞추는 커다란 손이라서 나는 임종을 앞둔 바람을 써 내려가는 시인이 되고 못은 관의 노래를 물결로 새긴다

―시집 '돌과 나비' (서정시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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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빈 시인·문학의 집
장하빈 시인·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남매지'에 전해오는 슬픈 전설을 아는가? 조선시대 경산현에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부잣집 종살이하던 남매가 있었는데, 빚을 제때 갚지 못해 누이가 그 부잣집 영감의 첩이 될 위급한 상황에 놓이자 남매가 함께 못에 빠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애통한 이야기!

언제라도 그 슬픈 전설 속의 오라버니가 부르면, 아니 내 오라버니가 보고프면 나는 '남매지'로 맨발로 달려간다. 못가에 발 담그고 앉아 못의 겨드랑이 간지럼 태우면 껄껄껄 웃는 오라버니 앞에서 나는 배고픈 노파, 맨발의 가수, 병든 아가, 거짓말쟁이, 개망나니, 마지막 잎새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여운 존재가 된다. 하지만 어느결에 "내 마음 떨어져 나간 모서리를 끼워 맞추는 커다란 손"으로 부활한 오라버니 앞에서 바보 천치의 슬픈 생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는가?

이렇듯 삶의 파란곡절(波瀾曲折)이 담긴 '남매지'는 생의 무덤이자 요람으로, 과거와 현재가 엄연히 공존하는 장소다. 오늘도 남매의 가련한 혼을 좇는 바람의 후예들이 저마다 기쁘고 슬픈 생의 보자기 두르고 와서 반짝이는 물결 위에 펼쳐 놓고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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