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억새 군락에 가보라. 모든 것을 상실한 이의 허망한 자취를 보게 되리. 바람이 웅웅 울고, 마지막까지 남아 은둔할 채비를 하는 이를 만나게 되리. 착실하게 다가오는 계절은 더욱 가깝고, 맨살로 부대끼는 이의 처절한 몸부림이 큰 기척으로 들려올 테니, 태초에 너의 싹이 배양되었던 그 땅을 정독하여 읽어보라. 부풀어 하얀 깃털을 한낮의 환한 반딧불이라 착각하지 마라. 빛은 멀어지고, 몸뚱어리는 가벼워졌으니 이제 불 지를 날도 다 갔다. 사리처럼 엉겨 붙은 저 결정체가 다 날아갈 때까지, 바람은 또 얼마나 잘게 부서져 불어오고 불어갈 터인가. 건들면 순간에 베어버릴 듯했던 시퍼런 오기가 가고, 이제 조금은 누그러진 나를 만날 텐가. 이제 말하리, 나는 무한한 분출의 시간을 갖는 것일 뿐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너를 향해 있던 내 침묵을 지루하게 여기지 마라. 여기, 버려진 허망한 영토에 나는 뜨거웠던 여름 동안 확확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누르느라 숨이 막혔다. 끝없는 침묵이었다. 그만큼 나는 몰아적 이상을 만나고 싶었고, 또 영원한 세계의 문턱을 기웃거릴 수 있게 되었다.
뒤돌아 생의 공허와 모순을 은닉하고 은폐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이 끝없고 먼 계절 또한 홀연히 떠나고 나면, 백주에도 환히 날아올라 잃어버린 것들의 이름을 부르리. 모든 것을 빼앗긴 이의 허망한 자취를 따라 더 침묵할 터이고, 나는 감당해낼 수 없는 절망에 울 테지. 누가 나를 연민할 것인가. 침묵을 걷는 이여, 침묵을 대변하는 이여, 부디 이 잔상의 뒷자락에서 영혼을 잃게 하라. 그리하여 끝없이 멀고 그리운 이에게 전해 다오. 우리는 공허와 모순을 안고도 질긴 생명적 진실을 육골 속에 새겨 넣는 그런 사이였음을.
그리하여 사랑하는 모든 이여, 이제 우리의 절정은 멀어졌고, 지금 내 눈으로 목격하는 저 가벼운 흩날림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 마오. 버려진 영토에서 비로소 처연히 서정을 쓰노니, 이제 우리 영원한 세계의 문턱을 함께 넘을 수 있겠소.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 저 빈 들에서부터 겨울이 오노니, 이제 가련한 겨울의 난민들이 맨발로 바람을 걸어갈 것이오.
억새의 군무가 아름답소. 무심한 풍경이라오. 내 그대를 앞세워 겨울을 맞이하노니, 폐허의 지경에서 이상스럽게도 호젓하오. 바람이 잦아들면 가장 먼 곳에서부터 대지가 언다오. 나는 이제 발아래 내려앉은 만감의 그리움을 읊을 것이오. 나는 오랫동안 부재할 것이고, 나의 부재를 그리워하지 마오. 그리하여 내 안에서 환히 비추던 이여, 이제 이 계절에 당신을 봉인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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