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 속 숨은 이야기 ③ 미스터리의 여왕 하트셉수트

하트셉수트 좌상, 다이르 알-바흐리의 하트셉수트 신전에서 발굴, 높이 196cm, 석회석,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루브르박물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유럽과 미국의 유명 박물관의 이집트미술 섹션에서 관객들의 눈에 특별한 조각상이 눈에 띈다. 여자인데 파라오 복장을 하고 있는 조각상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이집트의 여왕이라면 떠올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주인공일까? 천만에! 이집트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여왕은 로마제국 지배 시기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니고 하트셉수트

하트셉수트 좌상
하트셉수트 좌상

이다.

그녀는 때로는 수염이 달린 남성으로, 때로는 여성으로, 때로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집트 미술은 파라오가 세상을 떠날 때 원래의 자리인 신들에게 돌아간다는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발달했다. 신적인 존재인 파라오의 여느 조각상들은 딱딱하고 초월적인 모습인데 비해, 하트셉수트의 조각에서는 호리한 몸매와 살짝 솟은 젖가슴, 어딘가 응시하는 눈빛으로 관람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숨을 불어넣는 사람'으로 불린 이집트 조각가도 젊은 여왕의 인간적인 매력을 감출 수 없었나 보다.

하트셉수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신왕국(기원전 1550~1069년) 초입, 제18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행정과 군부 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신전들을 새로 보수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는 동시에 사업도 활성화시켜 이집트 전역에 평화를 정착시킨 치적을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기를 열망한 군주답게 그녀도 건축물들을 통해 초자연과 교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위압적인 기념물이 아니고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는 건축물을 원했다. 그녀가 남긴 여러 건축물 중 하나인 테베 서쪽 다이르 알-바흐리의 신전이 이를 대변한다. 당시 이집트 신전은 비밀스러운 성소로 왕과 신관들에게만 허락된 구조인 데 비해, 이 신전은 탁 트인 광장과 다층구조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하트셉수트의 장례의식과, 아몬 레, 미라와 공동묘지의 신 아누비스를 위해 건립된 이 신전은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인 건축이었다.

투트모스 1세가 가장 총애한 딸인 하트셉수트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부터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한 살 어린 이복동생과(후일 투트모스 2세) 결혼한다. 신에 대해 인간을 대표하도록 신들이 지명한 존재가 바로 이집트의 왕, 파라오였다. 이러한 이유로 순수혈통만을 고집한 탓에 파라오들에게 이복 또는 친형제・자매간의 결혼은 다반사였다.

투트모스 2세가 일찍 죽자 왕비인 하트셉수트는 후궁의 소생인 겨우 네다섯 살짜리 아들을 투트모스 3세로 세우고 섭정을 시작한다. 곧이어 그녀는 명목상 공동통치체제로 바꾸지만 명실상부한 실세 파라오로서 무려 22년 간 이집트를 통치한다.

여왕의 치세에서 한 남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다이르 알-바흐리 장제전 건축을 총괄한 세넨무트이다. 그는 여왕의 딸 네페루레의 가정교사였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다. 세넨무트라는 이름은 '엄마의 형제'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공주의 교육을 전담하면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라는 학설도 있다.

찬란한 업적을 남긴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사후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누군가 아주 계획적으로 그녀의 업적을 기록한 것들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의 땅'으로 불리던 푼트 원정을 상세히 기록한 저부조들은 망치질로 아주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있다. 1859년, A. 마리에트가 고고학 탐사 중 이 저부조에서 '하트숍시투'라는 발음으로 읽히는 희미하게 남은 문장을 찾아내면서 역사에서 지워졌던 여왕은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기존의 학자들은 투트모스 3세가 하트셉수트 사후 그녀의 기록을 훼손했을 걸로 추정했으나, 60년간 이집트학에 매달린 프랑스의 한 여성 금석학자에 의해 오시리스 신관단에 의한 만행으로 밝혀지게 된다. 하트셉수트는 어둠의 비밀의식에만 치중하는 오시리스 숭배보다는 태양신 관련 상징에 비중을 두고 이집트 신앙체제를 보다 명쾌하게 이끌었기 때문에 그녀 사후에 종교적 헤게모니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국가통치자가 여성이 많지 않은데, 고대 이집트에서 위대한 여왕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박소영(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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