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숫자나 형상과 같이 구체화된 것을 다룬다. 영상의학은 질병을 형상화하는 과학이다. CT와 MR이 개발되기 전, 영상의학은 혈관촬영이 주된 기법이었다. 혈관촬영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혈액에 녹는 조영물질은 혈관에 투입 후 X선을 투사하여 영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론은 간단하지만 조건이 만만하지 않다. 우선 혈액에 주입하는 조영제가 인체에 무해하여야 하면서 X선을 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초기에 혈관 조영제로 사용한 물질이 양귀비 씨에서 추출한 요드화 지방산이 주성분인 리피오돌이다. 100년전 이를 개발하여 상품화한 사람은 프랑스 약사 마르셀 게르베였다. 게르베는 세계적 조영제 회사의 상호명이 되었다.
소수의 의사들만이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리피오돌이 올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리피오돌은 혈관촬영 조영제로 출발하였지만, 간암에 흡수되어 간암 세포를 파괴하는 효과가 있어 간암 치료에 중요한 물질로 개념이 바뀌어 버렸다. 영상사진을 획득하여서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치료효과도 있으니 의학약의 조건으로는 더이상 적합할 수 없는 물질이 된 것이다.
문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쪽에서 혈관촬영을 이용한 간암치료 시술 건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부터이다.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는데 비해, 양귀비 씨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었다.리피오돌의 수입을 담당하는 업체에서 적자 누적의 이유로 보험가를 5만원에서 30만원으로 인상되지 않을 경우 리피오돌의 공급을 중단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리피오돌이 간암의 화학 색전 물질로 분류되어 보험 급여 대상이기에 환자가 본인의 돈으로 살수도 없고, 병원 역시 의약품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보건복지부와 수입업체가 대치하게 되었다. 한때 인기를 모았던 철학책의 문제, 즉 제약회사가 암환자를 볼모로 약값을 인상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가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면접이나 입시에 출제될 법한 소재이며 각자의 세계관이 충돌할 수 있는 의제이다.
반응은 짐작한 대로 흘러 갔다. 보건의료 관련단체는 다국적기업, 암환자, 생명 존중과 같은 핵심어로 업체를 비난하였다. 리피오돌은 이미 특허가 끝난 제품이라 어떤 제약회사에서도 제품화할 수 있었고, 정부에서도 제약 업체에 국산화를 타진하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만들 수 있는 것과 경제성이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올해 9월부터 19만원으로 인상하는 선에서 협상이 완료되었다. 업체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결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라별 공급가격이 달랐는데 한국이 50달러, 베트남 100달러, 홍콩 200달러, 중국 500 달러, 미국 800 달러였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한국공급이 특별히 매력적일 이유가 없다.
엄중한 교훈은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수요자가 있으면, 우리에게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의약품 혹은 의료기기는 정부가 수입을 허가하고, 의료보험공단이 보험급여를 결정하지만 누군가는 그 제품을 수입해야 한다. 그 제품을 소수의 사람만이 이용하고, 수입으로 인한 이득이 많지 않다면 아무도 수입하지 않을 것이다. 실례로 외상성 경동정맥루 혈관치료적 치료법에 사용되는 분리형 풍선이 수입 중단되어 치료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며, 심장 수술용 인조혈관, 위암 수술용 내시경 칼 등이 수입 중단의 논란 속에 있다.
최근에 의료보험은 보장성을 강화하고 환자의 본인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진행하고 있다. 의학의 발전은 궁극적으로는 환자의 개별적 질환에 맞춤화된 의약품 혹은 의료기기의 종류가 증가하는 것이다. 보험보장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특정질환을 앓는 소수의 수요자에게만 필요하는 수입품의 종류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종류는 증가하지만 사용자는 소수이어서 사용양이 많지 않을 경우, 매출이 작고 수입마진이 높지 않아 수입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시장이 크지 않으니, 특허기간이 끝나더라도 국산화로 대체하기도 어렵다. 사용의 필요성이 없는 다수 국민의 공론을 이끌어 내기도 어려워 꼭 필요한 환자와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이번 리피오돌 논란은 의약품 혹은 의료기기의 국산화와 수입 과정을 포함한 공급 문제에 대한 고민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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