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중문화를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TV외화가 '환상특급'(원제: Twilight Zone)이다. 밤늦은 시간에 방송되던 이 드라마는 매 에피소드마다 기괴하고 섬뜩한 내용이 소개되곤 했다. 드문드문 봤던 그 시리즈 가운데 내 기억에 아직 남아있는 몇 편이 있다. 제목이 심야의 화랑인가 그런데, 내용은 이렇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한 나치 전범이 남미로 도피해서 과거를 숨기고 살았다. 늘 불안에 떨던 그가 가진 유일한 낙은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그가 좋아한 작품은 아름답고 조용한 호숫가에서 어떤 사람이 느긋이 낚시하는 그림이었다. 전범 수색에 나선 기관의 추적 망이 자신에게 좁혀 오는 것을 느낀 그는 그림 속의 낚시꾼이 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생각했다. 이 드라마의 결말은, 각자 확인하시라.
환상특급의 주인공처럼 잘못을 저질렀던, 아니면 똑바로 살았던 상관없이 우리는 가끔 어려운 순간을 피할 수 없다. 인생의 고난은 선악과는 별개의 문제다. 누구나 삶이 어두운 구석에 와 닿을 때면 현실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 현대미술가 이정은의 작업도 그런 이상향의 실현체다. 희뿌연 빛을 머금은 배경 앞에 네발 달린 짐승들과 나무들이 있다. 3D프린터 기계로 깎아낸 조각들이라고 한다. 말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동물의 형상은 기계가 정교하지 못한 한계 때문이 아니다. 작가는 조형의 완성을 어느 선에서 일부러 멈춘다. 왜? 어차피 저 너머(beyond)의 세계에 뭐가 있는지, 그 피안의 상태를 우리가 기대를 할지언정 이렇고 저렇고 따질 입장이 되나.
흰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들은 빛의 반대쪽 그림자와 합쳐져 흑백의 디오라마를 완성한다. 전체로 볼 때 동양화의 격을 갖춘 이 전경이야말로 지금 현실 도피를 꿈꾸는 누군가가 그 안에 끼어들 여지를 둔다. 그곳은 순수하다. 그리고 돌아올 출구가 없다. 이미지는 지극히 정적이지만 작품의 원천을 제공한 근거가 미디어 아트라는 점은 매력 있는 역설이다. 모든 예술가가 현실을 넘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을 두고 있다. 이정은은 기술과 감성이 충만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인다. 그곳은 낙원일까? 지금의 나로선 모르겠다. 이럴 땐 하이쿠 한 편이 제 격이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을 구경했네.
윤규홍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