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현진건은 왜 일본육군예비학교를 중퇴했을까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1885년에 설립된 세이죠 중학교의 설립 당시 모습
1885년에 설립된 세이죠 중학교의 설립 당시 모습

현진건은 1910년대 중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유학처는 '나라(城)를 이룬다(成)'는 뜻으로 교명을 지은 육군예비학교 세이죠(成城)중학교였다. 두 명의 조선 총독을 비롯해서 일본제국을 이끈 수많은 군인들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일본 군인만 배출한 것이 아니었다.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 강력한 근대국가 건설의 열망을 지닌 청나라와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의 군사능력을 배우기 위해서 세이죠 중학교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훗날 중국공산당을 설립한 혁명가들, 그리고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상정 등이 있었다.

현진건이 왜 육군예비학교를 선택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무관이었던 할아버지에서 제정 러시아 사관학교 졸업생 큰 형으로 이어지던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에 앞서 세이죠 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대구출신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권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건 십대 중반의 현진건은 '무력'을 길러 조선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이광수, 김동인 등 근대문인들이 근대적 지식을 배워 조선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현진건은 어렵게 입학한 세이죠 중학교를 채 2년도 다니지 않고는 중퇴한다. 그로부터 수년 후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현진건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현진건이 유학을 한 시기,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다. 부국강병의 이상 아래 근대일본 건설에 전력투구한 아버지들의 시대가 끝나고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자식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 특수로 경제 호황이 이어지면서, 아사쿠사 극장가에는 밤늦게까지 공연이 이어졌고 서구적 연애에 취한 젊은 남녀들이 카페로 모여들었다. 한 편에서는 서구에서 유입된 사회주의사상과 남녀평등 사상에 몰입한 신청년들이 여기저기서 사회개혁을 외치고 있었다.

현진건은 이 새로운 시대가 열리던 시기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군사학교의 강철같은 규율 속에 갇혀있기에는 너무나 자유롭고 낭만적인 시대였다. 그 열정적 시대 분위기가 현진건의 내면 깊숙이 갇혀있던 '시인'적인 감성과 자질을 건드린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추정을 받아들인다면 육군예비학교를 중퇴하고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그 선택의 수수께끼가 다소 풀린다. 물론 소설가를 선택했다고 '혁명가'의 길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력'양성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서 사회개혁을 이루려고 했을 뿐이었다.

처녀작 '희생화'(1920)에서 현진건은 신청년들 간의 비극적 연애를 통하여 불합리한 관습타파를 주장했다. 러시아 소설을 번역한 '행복'(1920)에서는 하층민의 부조리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계급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1943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식민지 조선의 부당한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을 썼고, 혁명을 외친 모든 사람들이 신념을 버리는 순간에도 혁명적 정신을 버리지 않았다. 폭탄을 던지며 독립을 외치는 대신 글을 통해서 일제에 대항한 것이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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