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대스타가 꿈인 펭귄 인형 '펭수'의 인기는 최근 사회적 신드롬으로까지 발전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거침없는 입담으로 자존감까지 높여주는 펭수의 언어는 어록이 되고,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끌어내리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쾌감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펭수의 인기비결이 바로 이것이다. 보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것.
카타르시스(Katharsis)는 '순화', '정화', '배설'이라는 뜻이 있으며,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감정을 '진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문학에서는 비극의 과정을 보는 관객에게 연민과 동정, 슬픔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감정을 정화·배설'시키는 효과를 의미한다.
긴장감 넘치는 영화를 보며 느끼는 통쾌함과 슬픈 영화를 보며 쏟아내는 눈물이 마음을 후련하게 할 때가 있다. 막장드라마를 보며 열광하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정치토론을 보며 흥분하며, 먹방 프로그램을 보고 대리만족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보며, 글을 쓰고, 여가생활을 즐기고,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6년 전 배우로 출연하여 악극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경제의 오늘을 일군 중장년층을 위한 공연이었다. 1천 석이 넘는 극장에 백발의 머리를 한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공연에서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후회하며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밀려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최대한의 감정절제와 표현의 경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순간 관객들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함께 울었다.
커튼콜 때 퍼지는 박수소리는 애잔함과 먹먹함 보다는 후련함으로 다가왔다. 그날 그 무대에서 느낀 카타르시스를 잊을 수가 없다.
서로 살아온 시대는 분명 다르지만 무대에서 펼쳐지는 비극을 통해 서로 교감하고 그것을 분출하며 스스로 마음을 정화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세상을 향해 힘겹게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가의 어떤 작품이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애쓰는 가장,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이상과 현실에서 힘겨워하는 청년들, 또는 그냥 누군가와 대화가 필요한 어떤 이에게 공감을 얻고 위로가 되어 그들의 삶에 조그마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존재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항상 연기를 하며 '목적'과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연출을 하면서는 '미덕'과 '사람'에 대해 고민한다. 이런 작품을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관객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정화하며 다시 한 번 더 잊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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