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본다. 히틀러가 선동적인 언사로 패전 후 절망감에 빠진 독일 국민을 사로잡아 권력을 움켜쥔 뒤 군비를 확장해 주변 국가를 침략함으로써 이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직 히틀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해석을 반박했다. 지은이는 역사는 한 사람의 일탈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 이면에는 보다 많은 정치적, 외교적 움직임이 얽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벼랑 끝 전술·유화 정책 '잘못된 만남'
히틀러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그저 "더 잃을 게 없으니 무력도 불사하겠다"고 떠드는 허풍쟁이에 불과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유화정책'만을 시도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이 거들었다. 복잡한 상황을 통해 각자 자국 내 권력과 국가 이득을 거머쥐려는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의 인물들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신생 공산주의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싶은 소련인들도 있었다.
지은이는 히틀러의 행동 동기를 권력과 강력한 독일제국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한다. 다른 나라의 여느 정치인과 별다를 것 없는 동기다. 히틀러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행동방식에 있었다. 그는 행동하기보다 기다렸고, 실력행사보다는 큰소리를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바로 '벼랑 끝 전술'이다. 반면 히틀러를 막아야 할 주요 국가 대표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히틀러는 군비를 은폐하는 대신 부풀렸고,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척만 했다. 히틀러는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아서 가져다주기를 기다렸다.
지은이는 당시의 외교 기록과 히틀러의 공식 및 비공식 발언, 전후의 전범재판 기록, 전쟁 기간 내 주요국의 통계 지표를 치밀하게 인용한다. 그 결과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독일은 당시 전쟁을 할 여력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총력전이 아닌 소규모 무력시위와 으름장만으로 승리를 얻으려 했고,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목표한 바에 거의 다가갔다. 1938년의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같은 해 9월의 뮌헨 회담, 1939년 3월의 프라하 점령에서도 히틀러는 그저 큰소리 좀 치고 기다렸을 뿐이다.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슈슈니크, 체코슬로바키아의 하하,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등 그의 상대들이 히틀러의 위협에 초조해하며 히틀러가 원하던 바를 해주었다. 히틀러 자신은 독일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상대들은 불행히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외교적 전술이라기보다는 도박에 가까웠다.
◆역사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사실 전쟁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돌리는 것만큼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도 없다. 히틀러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던 대항론자에게 사악한 히틀러의 존재는 이제까지의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해 주었고, 유화론자들 또한 미치광이 히틀러만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의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독일인들 또한 독재자 히틀러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2차 대전의 책임을 히틀러 한 사람에게만 지울 수는 없으며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 각국의 외교관과 정치인, 군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권력과 선거에 대한 집착,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심지어 개인적 야심으로 매순간 오판을 했다. 독일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히틀러에게 전권을 넘겼다. 몇몇은 전쟁을 대비하자고 했고, 몇몇은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은 전쟁을 근심했지만, 진심으로 전쟁을 바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은 일어났다. 많은 이들의 오판과 착각, 그 바탕이 된 근거 없는 낙관과 비관뿐이다.
지은이는 "전쟁의 원인은 독재자들의 사악함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실수에도 있었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오직 히틀러 한 사람에게만 전쟁의 책임을 묻던 기존의 견해에서 벗어났다. 히틀러를 세계의 파멸로 이끈 '역사의 기획자'에서 그저 권력을 쫓았던 '역사 속 한 인물'로 내려놓는다. 복잡하게 꼬인 당시 외교와 정치사의 숨은 행간을 찾아 그동안 히틀러의 뒤에 숨어 면죄부를 받던 이들을 역사라는 무대 위로 다시 끌어올린다.
이 책의 출간으로 지은이는 나치의 부역자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강의도 접어야만 했다. 대중과 학계 모두 그에게 찬사보다는 격한 비난을 보냈지만 끝내 이 책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책의 설득력이 너무 강력했던 것이다. 이번에 나온 한글판은 저자 사후 1991년 출간된 증보판을 번역했다. 560쪽, 3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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