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학교이고 만나는 사람 모두가 스승'이라고 했다. 2018년 12월 초, 도서관 수험생 인문학 특강에서 만난 학생이 가끔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어 보라고 했는데 이 학생의 답이 독특했다. '세상의 모든 학문 섭렵하기'. 배우는 게 재미있냐는 물음에 "강사님도 그렇지 않냐?"라며 되물으면서 자기는 공부가 즐겁고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책이든 정독하는 편이라 읽는 속도가 느리지만 다 읽고 나면 뿌듯하고 책이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더 놀라운 건 다른 학생들의 반응이다. 자칫 잘난 척으로 비쳐질 수 있는 친구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쟤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학생은 쉬는 시간 10분을 제외한 두 시간 동안 청강자로서 예의를 갖춰 강의 내용에 집중했고, 옆과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말할 때면 상체를 돌려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진정성과 기품이 웬만한 어른보다 나았다.
모 육군부대 특강에 참석한 한 사병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무인도에 유배당한다면 어떤 책을 가져가고 싶습니까? 열 권만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만년샤쓰'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조화로운 삶'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문장 강화' '스무 살 어머니' '체 게바라 평전' '무소유' '그 여름의 끝' '연탄길 1권' 이상 끝."
이 열 권은 줄을 긋고 메모하면서 성심성의껏 읽은 책들이다. "역시 강사님은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라며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실상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장병은 그중에 자기가 읽은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밖에 없는데 기회가 되면 다 읽어보겠다고 했다. 제목을 받아 적은 걸로 봐서 빈말 같지 않았다.
장병이 한 질문은 프랑스 대문호 앙드레 지드가 1913년 4월 작성한 목록에 그 연원이 있다. 문예잡지 '누벨르뷔프랑세즈'로부터 당시 좋아하는 소설 10편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지드는 고등학교 시절 새 학기가 되면 무인도에 가져갈 책 목록을 작성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을 비롯해서 10권을 꼽았다. 이는 여름 휴가철에 자주 소환되는 놀이이자 독서 활동으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 오래전 미국에서도 유행했는지 모티머 J. 애들러와 찰스 밴 도런이 함께 쓴 '독서의 기술'(범우사)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2018년 11월 7일 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옆 라인에 불이 나는 소동이 있었다. '무엇을 챙겨 대피해야 하나.' 그 찰나에도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가방에 쑤셔 넣고는 냅다 달렸다. 불이 난 집에서 폭발음이 울리고 시커먼 연기가 아파트 벽을 타고 올라갈 때의 공포감은 엄청났다. 소방차 호스가 내뿜는 물기둥이 발코니 창문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가하게 불구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이 들어 필요한 짐을 제대로 챙겨왔는지 확인하려고 가방을 열었더니 차 열쇠, 지갑, 양말 한 켤레, 다이어리가 전부다.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도망갈 때 다 버리고 갈 물건인데 지금껏 왜 그렇게 수집에 집착했을까? 제대로 읽은 책이라면 불에 타 없어져도 머리에 남아 있고 제목을 떠올려 다시 살 수 있지만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을 텐데.
꽤 오랜 시간 맹목적으로 책을 사 모았다. 사 놓고 읽지 않은 책, 읽지 못한 책이 수두룩하다. '언젠가는 읽겠지' '제목만 봐도 반은 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얼마 전 이사한 연구소에 지인들이 찾아왔다. 보기 좋게 잘 꽂아 둔 책들을 보면서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는 틈새로 삐죽이 나온 질문이 한때 유행한 말을 빌리자면 뼈를 때렸다. "그런데요. 책이 왜 이렇게 깨끗해요? 혹시 안 봤어요?"
독서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자주 있었지만 반성은 잠깐이고 나쁜 습관이 지속됐다. 언젠가부터 책을 대함에 있어 겉멋이 들어 있던 나를 반성하면서 다시금 '독서의 기술'을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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