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인간의 존엄과 아가페 사랑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영성과 교수

오늘날 사랑은 친근하고 쉬운 말이다. 커피로 치자면 아메리카노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사랑은 그들의 삶과 문화의 중심이었고, 언어의 무게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사상이 깊고 문화가 풍부할수록 표현이 정교하고 세련되며, 그 의미는 다양하게 분화된다. 그래서 로먼 크르즈나릭은 『원더박스』에서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여섯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가 남녀 사이의 사랑인 에로스, 둘째가 우정으로 번역되는 필리아, 셋째가 아이들 사이의 가벼운 사랑인 루두스, 넷째가 오랜 결혼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프라그마, 다섯째가 이타적인 사랑으로 대변되는 아가페, 여섯째가 자기애를 나타내는 필라우티아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넓고 깊게 이해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사랑과 정의』에서 서구인의 정신과 마음을 움직인 세 가지 근본 모티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첫째, 에로스-모티프는 플라톤과 플라톤의 전통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둘째, 노모스(nomos)-모티프는 율법과 정의에 대한 구약성경 저자들의 진술에 드러난다. 셋째, 아가페-모티브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가르침, 그리고 루터의 저작들에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렇다. 아가페 사랑(agapic love)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고, 기독교는 아가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폭로해 왔다. 예수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는 두 말씀에서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이 가장 독특하고 명징하게 나타난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하는 그때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안데르스 니그렌은 '아가페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사랑을 에로스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아가페 사랑은 심지어 대상의 가치에 무관심한 사랑이며, 사랑받은 사람은 그 안에 사랑받을 어떤 가치가 있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분배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게 주는 자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아가페 사랑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바울의 말을 무색하게 한다. 심지어 아가페 사랑이 피해자를 양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구약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정의는 그분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 렌 굿맨(Lenn Goodman)의 이야기처럼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이다'. 우리가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은 정의에 무관심한 사랑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랑이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정치, 경제의 지형뿐 아니라 삶의 양식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일일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가 중국을 훌쩍 넘어서고 있는 이탈리아는 의료 인력 부족은 물론이고 의료기구가 모자라 병원마다 대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의사들은 젊은 환자를 먼저 치료해 주고, 인공호흡기도 젊은 사람에게 우선 씌워준다고 한다. 생명의 존엄성이 제한된 자원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누구에게도 양도되거나 분배될 수 없는 각 사람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가 아닌가. 그것은 권력이 있고 없고, 재산이 많고 적고, 능력이 있고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를 회복하셨다. 기독교 하나님은 자기 축소와 자기 죽음을 통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셨다. 인간의 존엄은 아가페 사랑의 결과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아가페 사랑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영남신학대학교 영성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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