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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안중식(1861-1919), ‘탑원도소회지도’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23.4×35.4㎝,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종이에 담채, 23.4×35.4㎝,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안중식이 그린 근대기 아회도(雅會圖)이다. 하늘에 둥근달이 떠 있고 달빛을 받은 하얀 탑이 보인다. 앙상한 잡목과 숲 사이로 드러난 기와지붕 아래 난간을 두른 누마루에 술상이 차려져 있고 8명의 인물이 함축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화제는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 "임자(壬子) 원일지야(元日之夜) 위(爲) 원주인(園主人) 위창인형(葦滄仁兄) 정(正)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으로 1912년(지금으로부터 108년 전) 설날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집에 지인들이 모여 서로 세배하며 새해 덕담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밤이 늦도록 자리가 이어지자 참석자 중 한 명인 안중식이 집주인에게 그려 준 그림이다. 모임을 기념하고 길이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대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다.

오세창의 집은 탑골공원 근처인 돈의동 45번지의 대지 105평 되는 한옥으로 지금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이 있는 곳이었다. 원래 당호는 여박암(旅泊菴)인데 그림에서처럼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보여 지인들 사이에서 탑원으로 통했던 듯 오세창은 '탑원초의(塔園草衣)'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달밤의 하얀 탑, 기와지붕의 탑원, 8명의 참석자 등 실제와 가상의 풍경인 물안개가 자욱한 호수를 결합해 이들의 고상한 모임에 걸 맞는 정취를 나타냈다.

'도소회'는 연초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약술인 도소주를 마시는 것을 뜻한다. 6세기의 '세시기(歲時記)'류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동아시아의 오래된 풍속이었으나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중식은 이 그림에 왜 '탑원도소회지도'라는 고풍스런 제목을 달았을까? 혹시 이 날 길경, 육계, 방풍, 산초 등 약재를 넣어 만든 도소주를 실제로 마셨기 때문에 안중식이 이런 제목을 붙였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도소주는 동파관을 쓰고 나막신을 신는 고풍(古風)을 즐겼던 오세창이 담가 지인들을 대접했을 수도, 목돈이 생기면 안주거리를 쌀 보다 먼저 장만하고 집에 가양주가 끊이지 않았다는 안중식이 담가 가지고 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세창은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탑원에 칩거하며 우리나라 서예가, 화가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해 1917년 『근역서화징』을 탈고한다. 총 1,117명의 서화가에 대한 기록을 모은 위대한 업적이다. 『삼국사기』부터 조선시대 문집에 이르기까지 274종의 서적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펼쳐보며 관련 내용을 일일이 발췌해 작가별로 정리한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미술문화에 대한 애착, 전통에 대한 존중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8년부터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 천도교 동지들과 기미독립선언을 준비한다. 이 그림 속 인물들 중에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8명 중 한명인 안중식 또한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등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였다는 이유로 삼일운동 후 일경에 잡혀가 경성지방법원에 내란죄로 회부되어 심한 문초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1919년 11월 2일(음력 9월 10일) 5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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