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여가, 사람답게 사는 조건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여름의 끝자락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소환해 본다. 그녀는 "어떻게 인간의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아렌트는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게 배우고,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지도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심지어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의 강의도 들었다. 그녀는 당대의 위대한 철학자는 물론이고, 신학자와 문인들과도 깊이 교제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녀의 '인간의 조건'은 인간은 단지 장소와 운명에 제한된 존재임을 암시하지 않는다. '인간의 조건'은 오히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아렌트는 우리의 삶을 크게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a Contemplativa)으로 나눈다. 그러면서 활동적 삶에는 세 가지 근본 활동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는 생산 활동이고, 작업은 생활 기구를 만들거나 예술 작업과 같은 활동이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공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노동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사적인 영역에, 행위는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공공의 장으로 자유의 영역에 두었다. 아렌트는 사적인 영역은 본질이 결여된 영역이기 때문에 그 결여는 공적인 영역에서 채워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사적(private)이란 말은 그 어원을 통해 볼 때도 '무엇이 결여된'(privative)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인간의 근본적인 악도 결국은 사적인 영역인 노동이 절대화될 때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다운 삶은 노동이 자기 결핍을 알고, 진정한 자유에 의해 형성되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공공성을 만들어 내는 자유는 무엇이고, 그 자유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유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수도 있고,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참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어떤 동기나 목적 없이 발생하는 자유다. 그런데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여가로부터 주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여가의 본질을 자유로 이해했다. 여가 즉 일상의 바쁜 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시간'이란 의미는 그리스어의 스콜레(scole)와 라틴어의 오티움(otium)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 철학은 여가를 '자유의 시간'으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유까지도 포함시켰다. 여가의 진정한 의미는 일을 쉬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코로나19는 휴가의 트렌드를 바꾸어 놓았지만 피서지를 찾는 휴가객을 막지는 못했다. 여가의 삶이 우리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여가가 휴식과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고역일 때가 많다. 우리는 여가가 여가답지 못하고 오히려 짜증을 유발하는 '여가의 역설'을 경험한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서도 일을 생각한다. 일로부터의 자유, 사유로부터의 자유 없는 여가는 여가일 수 없다. 일이 절대화되고, 소유가 신성시되는 곳엔 자유가 없다.

우리는 노동과 작업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하지만 사람다운 삶은 세속적인 삶이 멈추는 여가 가운데 있다. 우리는 여가 속에서 신적 자유를 경험하는 그때에 사람답게 사는 맛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리처즈(M.C. Richards)는 여가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무 편안해서 활동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될 때, 나는 가장 즐겁다. 또한 나는 이런 습관을 붙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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