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보수는 안녕한가. 대선을 2개월여 앞두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 속에 보수의 위기감이 커지는 양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놓고는 보수 내부에서조차 내전 수준으로 호불호가 갈린다. 다만 치열하게 논쟁하고 행동하며 활로를 찾는 것은 인상적이다. 1854년 창당된 미 공화당은 '자유', '시장경제', '통합' 같은 보수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가치를 실천할 때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보수 재건의 과제를 떠안은 미래통합당으로선 타산지석 또는 귀감으로 삼을만한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니다.
◆트럼프 극단주의 보수에 부메랑
'메모리스'라는 정치광고 화면은 코로나19 이후 미국인들이 잃어버린 일상을 비춘다. 시청자들이 생일 파티 같은 장면을 보며 아련한 그리움에 잠길 즈음 여성 해설자가 메시지를 날린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19가 우리에게서 앗아가 버린 기억들입니다." 그리고는 "트럼프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바보, 거짓말쟁이, 실패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이 영상은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캠프나 민주당이 만든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공화당의 반(反)트럼프 성향 인사들의 모임인 '링컨 프로젝트'가 제작했다. 목표는 오는 11월 3일 대선에서 트럼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당내 거물인 조지 파월 전 국무장관도 반트럼프 전선에 섰다. 로널드 레이건 재단은 트럼프 측에 레이건 사진을 선거자금 모금에 이용하지 말도록 했다. 공화당과 미 보수주의의 위기와 분열상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유권자들도 트럼프의 극단주의와 거친 언행, 무능 이미지에 등을 돌렸다.
실제로 바이든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이들의 절반 이상은 트럼프가 싫기 때문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 퓨리서치센터가 7월 27~8월 2일간 1만1천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에서조차 25%는 그의 무례함과 자아도취, 성급한 언행 같은 기질이 걱정된다고 응답했다. 물론 트럼프 열혈지지자들도 적지 않다.
트럼프의 사례는 한국 보수에겐 반면교사다. 먼저 강성 보수, 극우 세력과의 결별이다. 통합당은 강성 보수 단체 등이 주도한 광복절 광화문 집회와 관련,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코로나19 확산 책임론의 빌미를 줬다. 가동에 들어간 당무감사위원회를 적극 활용해 보수 강성층을 솎아내는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의 관계 단절과 중도로의 확장을 위해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입장 정리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통합당은 지난 13일 공개한 '정강정책 개정안 및 21대 총선 백서'에서 "탄핵에 대한 명확한 입장 부족"을 총선 패인 중 하나로 지목했을 뿐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사과를 포함한 별도의 입장 표명 없이 '박근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 공화당 내 반트럼프 이유는 단 하나다. 치열한 내부 투쟁 없이 극단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다. 당장 정권을 뺏기더라도 보수의 가치와 유연성, 포용력을 회복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사즉생'(死卽生)의 문제 의식이 당내 진짜 보수주의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불모지 호남 접근 '딥 사우스'처럼
미 공화당은 남북전쟁(1861~1865년) 이후 100년 동안 남부 쪽으론 가지 못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 공화당 정부가 이끌던 북군에 대한 반감 탓이었다. 북군의 윌리엄 셔먼 장군은 1864년 '바다로의 진군' 작전을 시작하면서 병사들에게 1주일 분량의 식량만을 지급했다고 한다. 약탈로 남부는 초토화됐고, 주민들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조지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민주당을 앞지른 것은 지난 1964년이 처음이다. 피해가 가장 컸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975년까지 민주당 주지사를 선택했다.
공화당이 '진짜 남부'(Deep South)를 공략한 비결은 뭘까. 반전의 계기는 1964년 민권법이었다. 공화당은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소수 종교, 여성 차별 등을 불법화한 이 법률을 정치 카드로 썼다. 남부 백인들이 봉기하자 민권법에 반대하는 '남부 전략'으로 인구의 대다수인 백인 껴안기에 나섰다. 인종주의에 편승한 노림수였지만 효과는 컸다. 그 해 존슨 대통령에게 참패한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가 승리한 6개 주 중 5곳이 '딥 사우스'였을 정도다.
자신감을 얻은 공화당은 장기적인 플랜 아래 거리를 좁혀간다. 남부의 주요 지역마다 '풀뿌리' 단체를 만들어 지방권력 잡기를 본격화한다. 풀뿌리민주주의는 공화당이 1935년 전당대회에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개념이다.
호남 접근의 가속 페달을 밟은 통합당으로선 눈여겨볼 만한 사례다. 김종인 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9일 호남을 찾아가 '무릎 사과'하며 '서진(西進) 전략'의 신호탄을 쐈다.
당 국민통합특위 정운천 위원장(비례대표)은 호남 출신의 비례대표 25% 우선 배정, 현역의원의 '호남 제2 지역구' 갖기 운동을 제안했다. 영남 의원이 호남의 지방자치와 자매결연을 맺고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한 법안 통과, 예산 확보 투쟁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1960년대 미 공화당의 풀뿌리 운동과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든 탑을 세우려면 진정성과 실천력이 관건이다. 정강·정책에 5·18 민주화 운동을 명기했다고는 하나 여권이 주장하는 역사왜곡처벌법 등과 관련해선 입장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 답을 찾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과제다.
이승근 계명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범보수의 호남 민심 끌어안기 행보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며 "얼마나 진정성 있게 지속적으로 약속을 행동으로 옮기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보수 아이콘 레이건
정치 지도자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의 보수주의를 이끌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랬다.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1964년 미 정치사 중 공화당 대선 후보가 민주당에 역사상 가장 크게 패배한 골드워터 지지 연설을 하면서 떠올랐다.
골드워터는 눈앞의 정치적 이익 대신 보수 가치를 정립하는 일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원칙과 양심'이 없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는 신념에 몸바쳤다. 그 노력은 16년 뒤 레이건 당선이라는 결실을 안겼다. 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대선 낙선자로 꼽히는 이유다.
레이건이 취임한 1981년 1월,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과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 허덕였다. 냉전 상황에서 자유진영의 동맹에게도 버림받은 처지였다. 레이건은 '자유', '시장경제', '통합', '작은 정부', '강력한 국방' 등 보수의 아젠더를 재정립해 공화당 노선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해리티지 재단 설립자인 에드윈 퓰너는 레이건의 리더십을 조명한 '레이건 일레븐'(지은이 폴 켄고르) 서문에서 "레이건의 원칙들은 다음 세대들을 연합하게 하고 진정한 보수주의의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평가했다.
'밸런스토피아'의 저자인 최문갑 전 뉴욕특파원은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긴축복지정책 등 다양한 보수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때론 이를 양보하기도 했다"며 "주정부 예산의 적자가 확실시되자 세금을 올린 게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그는 또 "레이건은 1950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 때 리처드 닉슨에 반대하는 선거운동을 했으나 1960년 대선에선 닉슨을 위해 뛰었다"며 "레이건의 전환에서 그가 통합의 가치를 중시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레이건은 가장 사랑받는 미 대통령으로 손꼽힌다. 2011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19% 득표율을 기록하며 1위에 올랐다. 2위는 14%의 링컨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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