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승교대결(乘轎對決)

임종대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신부가 탄 가마싸움

'승교'는 이동매체인 가마를 말하고, '대결은 가마끼리 싸우는 것을 말한다. 경남 하동군 '가마고개'에서 가마끼리 맞서 싸운 데서 유래했다고 '하동지 하권'에 전한다.

교여지제(轎輿之制)란 가마를 보고 신분을 알 수 있는 평교자(平轎子), 사인교(四人轎), 사인남여(四人藍輿), 장보교(帳步轎)로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또 경북 의성에서는 서당 학동들이 추석 때 가마놀이를 했는데, 남·북 양 팀으로 갈려 네 바퀴가 달린 가마를 밀고 당기다 빼앗거나 부서지면 이겼다. 이긴 편이 가마에 꽂았던 깃발을 전리품으로 노획하면 마을 풍악대가 이긴 편을 환영했다.

신분의 상징이었던 가마는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는 신행길에 탔다. 가마는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새 출발이고 남녀의 결합을 상징했다. 그 신행길에 맞은편에서 낯선 가마가 오면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였는데, 종종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때 기세에 밀리면 신부의 운세가 나쁘다고 하는 속신 때문이었다. 위의 승교대결(乘轎對決)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하동 가마고개에서 벌어졌다.

한쪽 가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가문과, 다른 한쪽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가문이었다. 남명은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받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하여 경의(敬義)를 신조로 실행하는 학자였으며, 퇴계는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하여 대유학자로 성(誠)과 경(敬)을 실천하는 대학자였다. 그 두 집안이 오랫동안 학문적 대립으로 반목해오다 급기야 가마고개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이 벌어졌다. 어느 한쪽의 가마가 비켜가거나 비켜주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을 골수에 사무친 파벌의식으로 팽팽히 맞서 사흘을 버텼다. 학문을 같이하는 양쪽 문하생까지 합세하여 천막을 치고 힘을 보탰다. 신부를 기다리던 양가 신랑 집에서도 달려와 가마고개의 대결은 파벌인 학문과 가문대결(家門對決)로 치달았다.

두 가문의 뿌리 깊은 반목은 타협을 거부하고 유가(儒家)의 인(仁)보다 의(義)만 앞세우며 양보의 미덕을 보이지 못하였다. 안동 중심의 퇴계 학풍과, 밀양 산청을 중심한 남명 학풍이 서로 우위를 강조하는 가문이기에 서로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수습해야할 절박한 상황이었다. 사흘을 눈을 부릅뜨고 맞선 두 가문에서 명예를 손상치 않고 수습할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참으로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유가의 인·의·예·지·덕을 져버리고 자기가문의 딸에게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무거운 돌을 가마에 넣어 주면서 그것을 치마에 감싸 앉고 벼랑으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두 신부가 절벽 강바닥에 떨어져 장사를 지내고서야 왔던 길을 되돌아감으로 이 대결은 마무리 되었다.

높이 뜬 달이 사방을 비추듯 유가의 높은 도덕률은 달처럼 그대로인데, 후세인들이 왜곡하여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조식 선생과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인 본질에서 벗어나 스승에게 엄청난 누를 끼친 것이다. 이 슬픈 '승교애담'(乘鮫哀談)은 '인간은 소우주'라고까지 천명한 유가의 본질에서 볼 때 가마고개에서 두 목숨을 낙화 시킨 것은 두고두고 애달픈 사연으로 남게 되었다.

(사)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