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가장 극적인 성공신화를 쓴 최고경영자'와 '은둔의 황제' 두 가지다. 1987년 삼성의 최고경영자가 된 이후 신경영 선언 등으로 다양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자동차 사업 실패 등 오점을 남긴 부분도 적지 않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대구에서 보낸 시절은 매우 짧은 편이다. 3살 때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고 1945년 해방 이후 어머니와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1947년 상경한 이 회장은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독 과학탐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無限探究)였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무슨 물건이든 손에 잡히면 뜯어보고 해부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기계에 대한 관심도 그때 생겨났다고 한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들과 지내다보니 외로움을 많이 탔고, 그 때 개와 영화에 빠져들었다.
3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갔으며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럭비에도 뛰어든 경력도 있다. 이 때 맺은 스포츠와의 인연은 이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는 데에까지 이어졌다.
이 회장은 고교 졸업 후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유년시절 개와 영화에 이어 청년 시절 이 회장이 심취한 분야는 자동차였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 됐다. 이 때의 관심이 나중에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게 된 요인으로 작동한다.
1967년 4월 홍라희 여사와 결혼한 이 회장은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삼성의 큰 그림을 위해 이 회장은 이 때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고 다녔다. 이후 이병철 회장의 만류에도 불구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256메가 D램의 신화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회장은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게 된다. 이어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에서 일을 시작했다. 창업주의 집무실 바로 옆방이었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서 선경(현 SK)에 밀리자 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경영능력에 대한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82년 이 회장은 교통사고를 당하며 위기의 순간이 닥친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자신의 푸조 자동차로 양재대로를 달리다가 덤프트럭과 부딪히며 차 밖으로 튕겨 나가는 사고를 당한 것. 당시 이 회장은 외상이 심하지 않아 2주 만에 회복했지만 항간에는 교통사고를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그때 진통제를 너무 많이 쓰자 이 회장이 마약중독이라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이 회장은 이병철 회장 별세 이후인 1987년 12월 1일 제2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취임식에서 삼성에 가장 먼저 입사한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한테서 그룹의 사기(社旗)를 건네받아 흔든다.
취임 이후 그룹의 변신을 꾀하던 그는 그러나 1993년까지는 이렇다 할 조처를 내놓지 않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에도 강진구 삼성전자 회장을 대리 참석시키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세인들은 이건희 회장을 '은둔의 황제'라고 불렀다.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전매장에 싸구려 취급 당하는 삼성제품을 본 이 회장은 이 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하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 이 회장은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에세이에 썼다.
당시 이 회장은 테이프를 갉아먹는 VTR, 시청 도중에 퓨즈가 나가는 TV를 쳐다보면서 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3만명이 만든 물건을 6천명이 고치러 다닌다. 암으로 치면 2기"라는 말도 했다.
이 회장은 "전자산업의 경우 불량률이 3%에 달하면 그 회사는 망한다. '불량은 암이다. 악의 근원이다'라고 되뇌면서 일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불량은 범죄'라는 철학도 그래서 나왔다. 이후 이 회장은 삼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국내 기업들의 출퇴근 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이른바 '7·4제'도 그다음에 나왔다.
삼성은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 즉시 라인을 멈추는 라인스톱제도를 도입해 불량률 제로에 도전했다. 신경영이 삼성의 체질을 뿌리부터 바꿔나갔고 초일류를 향한 새로운 걸음걸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삼성 품질 발전의 결정적 순간인 1995년 '화형식'이 벌어지고 1994년 국내 4위였던 삼성의 무선전화기 시장 점유율은 1년 뒤 시장 점유율 19%를 달성하며 1위에 올라섰다.

1990년대 중반에 일기 시작한 '애니콜 신화'는 국내 시장을 휩쓸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 휴대전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모토로라가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애니콜의 인기는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S 시리즈 등 모바일 기기의 혁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이 회장은 1990년대 들어 그룹의 주요 사업체를 분리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그룹의 소유와 경영 체제를 명확히 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1991년 11월에는 신세계와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1993년 6월 제일제당(현 CJ)을 분리했고 1995년 7월에는 제일합섬을 떼냈다. 이에 따라 전자·중공업·화학 등의 핵심 사업군과 이를 뒷받침할 금융서비스 사업으로 사업 구조가 새롭게 짜였다.
이 회장 취임 당시 9조9천억원이었던 그룹의 매출은 2013년 390조원으로 25년 만에 40배나 성장했으며 수출 규모도 63억 달러에서 2012년 1천567억 달러로 25배 커졌다.
시가 총액은 1987년 1조원에서 2012년 300조원을 넘어섰다. 총자산은 500조원을 돌파했다. 고용 인원(글로벌 기준)도 10만여명에서 42만5천여명으로 늘었다.
계열사 수도 비상장사를 포함해 17개에서 83개로 증가했다. 이는 신세계, 한솔, 새한 등 계열 분리된 기업을 제외한 것이다. 브랜드 가치도 급신장했다. 브랜드 컨설팅 그룹인 인터브랜드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 9위인 329억 달러로 추산했다.
삼성은 부품과 세트(완제품)에서 모두 글로벌 1위를 제패한 전무후무한 IT 전자 기업으로 우뚝 섰다.
1969년 흑백 TV를 생산한 이후 37년 만인 2006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소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2012년에는 갤럭시 시리즈로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 시장 세계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LSI 등 반도체 부문은 일찌감치 세계 1위 고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 회장에게 뼈아픈 오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자동차 사업이었다. 젊은시절부터 꿈이자 필생의 도전이었지만 기아차 도산 사태와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 회장은 차 한 대를 팔 때마다 150만원의 손실이 나던 삼성자동차를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다. 법정관리에 맡기고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채권단에 증여하기로 약속한다. 근로자와 하청업체에 대한 보상안도 내놓았다.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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