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잎이 꽃이 되는 계절이라지만 달리기 초보, 달린이들에게 가을은 썩 유쾌한 계절만은 아니다. 은행나무 암나무의 열매가 고약해서다. 은행 열매가 무더기로 떨어져 있는 구간은 지뢰밭에 가까워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 곳에서는 속도를 줄이는 게 능사다. 바삭바삭한 느티나무 주황빛 낙엽은 또 어떤가. 와사삭 밟아 걷기엔 최상급 족적이지만 뛸 때는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구름 걷어낸 하늘을 외면하기도 힘들다. 하늘이 짜낸 빛깔을 잠시라도 올려다보려면 속도 저감은 필수다. 가을볕마저 진해 레드 카펫처럼 깔렸다. 시상대에 오르는 주연배우처럼 한눈팔지 않고 품격 갖춰 달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매번 새롭게 먹으라고 있는 게 마음이다. 속도만 조금 줄이면 가을 한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호강에 겨워 문득 상상의 도미노에 갇힌다. 상상의 블록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질 때 쾌감이 일품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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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8. 5. 15. 19:30.
[현장기록] 대구 대표 공간된 '산업화의 길'
-한국관광공사 설문조사 10명 중 5명, 대구 대표 공간으로 '산업화의 길' 꼽아
-대구시와 기업, 시민 아이디어 모여 관광과 산업 두 마리 토끼 잡아
-2위에는 근대문화골목, 3위 수성못, 4위 앞산전망대 순으로 응답
...며칠 전 일본 NHK의 장수프로그램인 'ふらっとあの街 旅ラン10キロ(번역하자면 '10km를 훌쩍 달리며 여행하는 그 길'쯤 된다)'에 대구가 소개됐다. '韓国 大邱で 走る, 産業化の道 (대구에서 달리다, 산업화의 길)'라는 부제가 붙었다.
마음 가는 대로 10km 정도를 달리며 주요 장소에 멈춘다. 그리고는 그곳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산업화의 길'에 방송 대부분을 할애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의 생가를 소개하며 자국의 와세다(早稲田大學) 출신인 것도 언급했다.

'산업화의 길'은 국내에서는 익히 알려진 터다. 한국관광공사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9%가 대구 대표 관광코스로 이곳을 선택했다. 인지도 상승에는 방송 콘텐츠도 한몫했다.
국내 장수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KBS '동네 몇 바퀴 산책'에 소개된 데 이어 아이돌 스타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만나 퀴즈를 풀어보는 tvN '백스트리트 보이즈'는 물론, 러닝에 관심도 없던 연예인들이 육상선수들이 받는 훈련을 버텨내고 도심을 가볍게 뛰는 것으로 마무리돼 인간 승리의 훈훈한 감동이 있다는 호평을 받는 MBC '진짜 혹독한 러너'에도 소개되면서 국내외 주요 '구석구석 탐방 프로그램'의 그랜드슬램을 날렸다.
이곳이 최근 특별한 조명을 받는 배경에는 제일모직, 제일기획 신입사원 연수원 입성이 있다. 'ㅁ'자 모양으로 올라간 연수원 건물은 과장하자면 특급호텔처럼 보일 정도다. 주변 고층 아파트들이 떠받듯 옹립하는 모양새다. '창조캠퍼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제로도 이곳은 어린 여직원들의 배움터, 실업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대구삼성창조캠퍼스에 있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동상 뒤로 위용을 드러낸 신입사원 연수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산달이 가까워지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바뀌었다.
삼성그룹과 대구의 접점은 늘고 있다. 신입사원 연수원 준공이 가시권에 들어가면서 삼성라이온즈 모기업인 제일기획 본사 대구 이전설도 흘러나왔다. 제일모직이 R&D 센터를 대한민국 섬유 메카, 대구에 짓는다는 계획도 최근 발표되자 대구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산업화의 길'이 집중 조명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대구시민 아이디어 공모와 민간기업 도시재생 프로젝트, 삼성그룹의 미래동력, 대구시의 열린 행정력이 빚어낸 사중주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2038년 창립 100주년에 맞춰 대구와 다시 호흡을 맞출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던 플라잉카 대중화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구에서 시도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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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도미노가 모두 쓰러진 뒤 현실로 돌아온다. 수창공원 서편과 북편에 고층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달 25일 이건희 명예회장 별세에 대구에서 '산업화의 길'을 조명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더랬다. 삼성그룹의 시작인 삼성상회 터와 이건희 명예회장의 생가, 현재의 대구삼성창조캠퍼스를 이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하긴, 길이 밥 먹여주는 시대다.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강릉카페거리는 물론 대구에도 김광석길, 근대문화골목이 든든한 밥줄로 관광객을 팽팽하게 끌어당긴다.
대개 구간이 짧다. 짧아도 관광객 선호도가 높은 건 '여행 인증의 법칙'이라는 불문율을 따르기 때문인데 걷다 서서, 이것저것 살피고, 표지판 읽고, 사진 찍고, 적을 거 적고, 검색하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집어 먹고까지가 한 사이클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근대화의 길'은 악조건이다. 3km에 가깝다. 마음을 단단히, 강하게, 새로 먹어야 한다.

"삼성이 키를 쥐고 있습니다", "삼성이 먼저 나서면 저희가 해볼 생각입니다",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만 삼성에서 제안이 오면..."
'온정주의'에 기댈 수 없는 시대다. 삼성상회가 시작된 곳이라서, 이건희 생가가 있는 곳이라서. 이건 어디까지나 좋은 소재일 뿐이다. 삼성그룹이 먼저 대구시에 손을 내밀어주리라 바라면 곤란하다. 아는 사람이니까 더 잘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유아적 의존'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지, 다른 값인데 다홍치마를 살 리 없다. 삼성그룹이 어떤 기업인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고 했던 기업이다. 온 세상이 다 안다. 대구시도 '대구시민 빼고 다 바꿔보겠다'는 심정으로 나서야 한다. 혁신이 아니면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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