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논설위원 nove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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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고부] 쉿!

    [야고부] 쉿!

    18세기 일본 에도 막부는 '사치 금지령'을 내리면서 의복의 색을 쥐색, 차(茶)색, 남색 세 가지로 제한했다. 나라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통제적 색깔 강요가 개성 말살의 시대로 가는 것임을 백성들은 잘 안 듯하다. 이들은 농담(濃淡)을 조절해 여러 색상을 만들어냈다. '사십팔차백서(四十八茶百鼠)'라 불렸는데 48가지 차색과 100가지의 쥐색이라는 말이었다. 1990년대 중반 대구에서 자정을 넘겨서까지 영업할 수 있는 술집은 드물었다. 공원 잔디밭이 술집 역할을 대신했다. 잔디밭이 거대한 술집이 될 수 있음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부가 통제하면 인민은 빠져나간다"는 말은 인류사의 공식이었다. 그러나 뒷정리까지 깔끔하진 못했다. 여름철 새벽 공원에는 미처 위(胃)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못한 쓰레기가 쌓였다. 새벽 시간대를 노린 업장(業場)이 생기는 건 수순이었다. 만두 등 간편한 냉동식품을 해동해 내놓고 술을 팔았다. 일명 '편의방'이었다. 1998년 성업했던 편의방은 400곳이 넘었다고 한다. 체인점처럼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는 비난도 일었지만 1998년 4월 합법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석 달 뒤 정부는 광역자치단체장에 위임했던 식품접객업소 영업시간 제한 권한을 회수(回收)하기로 했다. 2021년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으로 구·군청 단위에서 자율적으로 금주 구역을 지정할 수 있게 되면서 '공원 금주'가 확대되는 추세다. 대구에서도 공원 등에서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과태료(5만원)를 내야 한다. 어디까지나 '적발되면'이다. 금연 구역에서 빨리 담배를 피우고 가는 이들이 있듯 얼른 술을 마시고 가는 이들도 더러 보인다. 술집에 가서 마시기엔 궁핍(窮乏)한 주머니 사정 탓일 텐데 조용히만 한다면 실랑이를 벌이기도 뭣하다. 야간에 야외 음주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세계에서 손에 꼽힌다. 우리나라가 그중 하나다. 사회적 합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공원 금주는 고성방가(高聲放歌)와 폭력 행위 등 방종(放縱)의 대가(代價)로 만취자들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음주를 만끽(滿喫)하는 건 불법이 아니라지만 역시나 고성방가는 금물이다. 쉿!

    2024-07-21 22:13:38

  • [야고부] 자세히 봐야 예쁘다

    [야고부] 자세히 봐야 예쁘다

    한여름 전국 최고기온은 대구의 몫이었다. '더위 자부심'(?)은 '대프리카'라는 별칭과 어울렸다. 수성구는 2008년부터 3년 동안 '수성폭염축제'로 승화하기도 했다. 대구를 식혀 준 3대장으로 가로수, 신천, 분산된 도심 기능이 꼽힌다. 특히 신천의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1990년대 시작된 '신천종합개발' 덕분이다. '숲세권' 못지않게 '천세권(川勢圈)'도 부각되는 시대다. 신천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의 가치를 매겨 준다. 1980년대까지 신천은 '똥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악취가 강했고 탁도(濁度)도 높았다. 선풍기로 여름을 나던 게 당연하던 때였으니 신천에 뛰어들려는 아이들도 있었다. 피부병에 시달릴 게 뻔했으니 어른들은 아이들의 등짝을 후려쳐 말렸다. 신천둔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둔치라 불러도 되나 싶을 만큼 무성한 잡초 더미였다. 혹여 공놀이라도 하다 공이 신천에 빠지면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운, 괴팍(乖愎)한 냄새를 경험해야 했다. 이제는 수달이 살고 밤낮으로 시민들이 걷고 뛰는 곳이 됐다. 어디에 내놔도 자랑할 만한 도심 하천이다. 이렇듯 수변 공간 개발은 자연과 가까워지며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契機)가 된다. 금호강도 그렇다. 진가를 알 수 있도록 하려면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세히 보면 예쁜 걸 보다 확실히 안다'는 것이다. 대구시의 '금호강 르네상스'를 난개발로 규정하고, 생태 환경을 고려해 '지금 이대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미개발을 공존의 동의어로 보긴 어렵다. 적절한 개발은 시민들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돕는다.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된 수성못이 대표적이다. 농업용 저수지가 시민 안식처가 되기까지 관(官)의 노력이 컸다. 자주 찾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 애썼다. 체계적인 개발과 고민이 스며들 때 만족도 높은 공간이 탄생할 수 있다. 자연을 통해 힐링이 이뤄지니 최대한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 있다. 다만 접근을 제한하는 DMZ나 곰배령 등과 도심 하천인 금호강은 결이 다소 다르다. 생태계 보존이 최우선 과제가 돼선 곤란하다. 이런 식이라면 수성못 둥지섬을 서식지로 삼았던 가마우지에게 대구시가 몹쓸 짓을 한 게 되는데 이에 수긍(首肯)할 시민은 없을 것이다.

    2024-07-14 19:06:29

  • [야고부] 아니 땐 굴뚝의 연기

    [야고부] 아니 땐 굴뚝의 연기

    "빵을 달라"는 굶주린 시민들의 요구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냐"고 반응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악성 루머의 희생자다. 현실 감각 없는 왕가의 무능을 강조하려는 혁명군이 만든 루머라는 게 정설이다. 혁명이라는 말에는 진실이 따라붙어 어울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敵)이라 판단되면 적폐(積弊) 프레임에 가두고 조작한 이야기를 퍼뜨렸다. 1793년 루이 16세 부부의 단두대 처형 이후 2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루머의 파급력은 여전하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인간의 고약한 습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멸종된 호랑이도 세 명이 봤다고 주장하면 존재 여부를 확인하자는 요구가 나온다. 호환 마마(虎患媽媽)보다 무섭다는 '아니 땐 굴뚝의 연기'다.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와 관련해 동승했던 부인이 언론에서 입장을 밝혔지만 '부부 싸움 중 남편이 홧김에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루머도 상상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정설처럼 빠르게 퍼졌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저희 부부는 성당에 꾸준히 나가고 착하게 살았다. 언론에서 어떻게 보도하든 저희는 진실만 말했고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실제 블랙박스에 기록된 부부의 음성에서 갈등 상황은 담기지 않았다는 게 경찰의 전언(傳言)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자당 관련 수사를 했던 검사 네 명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그중 한 명으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사건 수사를 담당한 박상용 수원지검 부부장검사의 탄핵 사유다. "2019년 1월 8일 저녁 울산지검 청사 내 간부 식당에서 술을 마신 후 울산지검 청사 민원인 대기실 바닥에 설사 형태의 대변을 싸고, 남성 화장실 세면대 및 벽면에도 대변을 바르는 등의 행위를 통해 공용물을 손상했다"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박 검사는 "터무니없는 루머라 대응할 필요도 못 느꼈다"고 했다는데 이런 게 검사 탄핵 사유가 되는지 그 똥 같은 발상이 '유치찬란'하다. '이재명 재판'에 차질을 주려는 속셈임을 알겠는데 그 방법이 너무 치졸해 보는 사람 낯을 화끈거리게 한다. 문제는 '아니 땐 굴뚝의 연기'의 위력이 무섭다는 점이다. 게다가 본인이 똥을 싸고 바르지 않았다고 정색을 하고 해명하기도 쉽지 않다. 박 검사로서는 참으로 고약하게 됐다.

    2024-07-07 21:46:41

  • [세풍]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세풍]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일본 교토대 100주년 시계탑 기념관 역사전시실에는 재학생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이들의 흔적을 남겨 둔 공간이 있다. 탈색된 군복, 빛바랜 일장기, 전쟁 중에 찍은 단체 사진 등이 전시됐다. 특히 엄마를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편지 앞에서 방문객이 머무는 시간은 길어진다. 침략 전쟁 여부를 떠나 일본인이라면 조국의 부름에 응했던 그들을 이곳에서 되새길 것이었다.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전쟁을 미화할 의도는 없지만, 조국의 위기에 헌신(獻身)한 이들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법을 아는 일본에 시기(猜忌)가 인 것만은 분명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소년소녀병을 예우하자는 법률안 통과가 이다지도 지난(至難)한 과정이어야 할까. 16대 국회 이후 관련 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는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대구 동구군위을)이 총대를 멨다. 6·25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 제정안 등 '6·25 참전 소년소녀병 유관 3법'이다. 발의 의원 10명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다. 소년소녀병 또는 그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국가유공자 단체에 '6·25 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를 추가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음에도 6·25전쟁 뒤 다시 징집(徵集)된 경우도 있었던 터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였다. 영화 '포화 속으로' '장사리'에 등장하는 학도병보다 더 어렸다. '중 2병'을 겪을 사춘기 청소년들이 조국의 참상(慘狀)에 분연(奮然)히 나섰던 것이다. 대부분 칠곡 다부동전투에 투입됐다. '워커라인'이라는 낙동강 전선의 최선두였다. 이곳이 무너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공로(功勞)를 기억하고 후세에 남기는 국가 주도의 기념관은 없다. 후손이 사비로 기념관을 세운다. '인천 소년병 이경종 기록관'이 일례(一例)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소년소녀병들에게 병적(兵籍)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군번(軍番)도 남아 있다. 130년 전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명예 회복 등에 지극정성이면서, 논란의 여지가 큰 민주유공자법 재발의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면서 소년소녀병의 결기(決起)에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1870~71년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에 점령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소설 '비곗덩어리'에는 희생을 당연시하는 상류층의 위선이 담겼다. 소설에는 피난길에 나선 무리가 등장한다. 정치인, 귀족, 성직자, 혁명가를 비롯해 창녀도 있었다. 이들은 중간 기착지에서 프로이센군 장교에 발목이 잡힌다. 통행허가권을 쥔 장교는 창녀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창녀는 조국을 짓밟은 프로이센군 장교를 거부한다. 피난은 기약 없이 미뤄진다. 평소 창녀를 무시하며 비곗덩어리로 불렀던 일행은 그녀에게 고결한 희생을 강조한다. 마침내 창녀 덕분에 이동이 가능해진 이들은 그러나 감사는커녕 그녀를 모른 척한다. 6·25 참전 소년소녀병을 대하는 대한민국이 겹친다. 젊으니까 나라를 지키는 게 당연한 듯 여기며 헌신을 강요하는 건 국가적 폭력이다. 소년소녀병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고 종국에는 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있으니 마땅히 그래야 했다던 이들이다. 3만 명에 달하던 이들은 전후 70년이 지난 현재 2천 명이 채 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시간만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2024-07-01 20:11:59

  • [야고부] 베스트셀러

    [야고부] 베스트셀러

    새로 문을 연 가게나 입주한 집의 적요함을 덜어 주는 무난한 소재로 책이 활용된다. 인테리어 비용치고는 경제적이다. 손때도 묻어 읽은 티가 나는 중고 책 100권 정도면 몇십만원으로 충분하다. 기왕이면 베스트셀러 비치를 권한다. 시대적 흐름을 읽는 독서인으로 비친다. 주인의 지적 매력을 고양하는 이미지도 자연히 따라붙는다. 베스트셀러는 '화제' '흥미' '유행' 세 요소를 장착하면 어김없다. 예컨대 유명인이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이야기를 쓰고, 출판사가 마케팅에 나서면 대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 지난해 초 발간된 영국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Spare)'를 들 수 있다. 형인 윌리엄 왕자에게 맞았다는 둥, 17세 때 첫 경험을 했다는 둥 통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영국 왕실의 인간적 면모를 궁금해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이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처럼 열지 말라는 방을 더 열어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자극형도 있다. 작품이 희소해지면 더 찾는다. 사적 대화 무단 전재 논란에 휩싸였던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그런 생활'이 그랬다. 소설인데 어떻게 피해를 주장하나 싶지만 그럴 만했다. 진한 마산 사투리를 텍스트에 배어나게 한 작가의 능력도 걸출했지만, 자신과 나눈 대화이므로 작품에서 빼라고 한 지인의 눈썰미도 절륜했다. 사람들이 결코 봐선 안 된다며 낸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이 베스트셀러 등극의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2021년 나온 '굿바이 이재명'이다. 형수 욕설 등 이재명 대표의 가족 갈등을 다루며 민감한 이야기가 실린 책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커졌다. 더불어민주당이 뜻밖의 영업력 좋은 마케터가 된 셈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부인 김혜경 씨가 2018년 펴낸 '밥을 지어요'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이 대표의 변호사비 마련을 위한 격려성 구매로 보인다. 정치인 관련 책은 순수 베스트셀러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팬덤으로 사들이는 경우가 많아서다. 인기 아이돌 가수나 트로트 가수의 음반 판매량을 근거로 명곡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것과 흡사하다. 그럼에도 66가지 레시피가 담겼다는 '밥을 지어요'는 요리 젬병을 돕겠다는 본래의 목적이 휘발되지 않길 바란다. 서가의 장식품으로 떠도는 운명도 아니길.

    2024-06-30 18:42:02

  • [야고부] 에릭센의 동화

    [야고부] 에릭센의 동화

    축구 종가 영국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의외의 팀이 우승한 가까운 사례로 2015~16 시즌 레스터시티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극적인 승부를 관용구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라 표현하는데 영국 언론은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동화'에 빗댔다. 의외의 팀의 동화 같은 우승이라 회자되는 대회 중에는 '유로 1992'도 있다. 스웨덴에서 열린 이 대회의 우승국은 동화의 성인(聖人) 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는 안데르센의 조국 덴마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덴마크는 이 대회 출전이 예정되지 않은 나라였다. 쉽게 말해 '대타 출전'이었다. 당시에는 본선 진출국이 8개국(현재는 24개국)에 불과했다. 지역 예선 같은 조 1위로 출전권을 따낸 유고슬라비아가 전쟁범죄의 주범이 되면서 대회를 열흘 앞두고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터였다. 대타로 출전한 팀의 우승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덴마크는 잃을 것이 없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발동했는지 기어코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손흥민의 팀,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의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도 동화 같은 기억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토트넘 홋스퍼 팬들에게 역대급이라 할 수 있는 이때의 성적은 곱씹어 되뇔 수 있는 소재다. 당시 전력의 핵심은 세칭 'DESK 라인'이었다. 델리 알리, 크리스티안 에릭센, 손흥민, 해리 케인의 앞 글자를 따온 공격진이었다. 현재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유로 2024'에서 크리스티안 에릭센이 동화를 써 가고 있다. 에릭센은 3년 전(코로나19로 2021년 대회가 열렸다) '유로 2020' 첫 경기에서 심정지로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선수 생활을 못 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밀란 소속이던 그가 예전 기량을 뽐내며 뛸 수 있으리라는 기대치는 낮았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만인 2022년 1월 프리미어리그 브랜트포드에서 복귀했다. 팬들은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했다. 7개월 뒤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누가 말했나. 예전의 활약상을 재연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간 승리의 표상이 된 에릭센이 '유로 2024' 첫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다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써 가고 있다. 아무렴, 동화는 '해피엔딩'이 기본값이니까.

    2024-06-23 18:34:24

  • [야고부] 신천 프러포즈

    [야고부] 신천 프러포즈

    아이슬란드의 데이팅 앱 중에 '이슬렌딩가복(Íslendingabók)'이라는 게 있다. 12세기 아이슬란드 중세 연대기 작가 아리 토르길손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다양한 가족사를 다룬 고서에서 이름을 따온 앱이다. 젊은이들은 데이트를 신청하기 전 친족 관계를 계산해 주는 이 앱을 유용하게 쓴다고 한다. 혈족 결혼으로 후대가 유전병을 앓지 않길 바라는 염려 탓이다. 인구 37만 명의 아이슬란드는 외국인 유입도 적어 몇 다리만 건너면 친인척인 나라다. 결혼 시기를 늦잡거나 비혼이 선택 사항으로 당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한 때에 이색 프러포즈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이 대구시에서 나왔다. 신천 대봉교 아래 1천50㎡ 규모로 둥근 섬 형태의 프러포즈 데크를 놓는다는 구상이다. 프랑스 파리 센강의 다리(橋)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수심이나 주변 건물의 위용 등이 다르긴 해도 침산교~상동교 사이 12개 다리들의 길이가 200m 정도로 센강의 폭과 비슷하다. 에펠탑이 코앞에 보이는 드비이 인도교(Passerelle Debilly)에는 자물쇠 수백 개가 걸려 있다.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한 보행자 전용 다리다. 나무 재질 바닥이 특이한 이곳에서 에펠탑을 보며 프러포즈를 하고 그 징표로 자물쇠를 걸어둔 것이다. 태생적으로 프러포즈란 게 밤에 접어들 무렵 시작된다는 점에서 에펠탑의 야경과 서쪽으로 보이는 일몰도 확실한 유인 요소다. 황혼에 이르도록 영원하자는 다짐을 가슴에 새길 방법은 없었는지 교각 여기저기에 맹세의 흔적들이 각국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낭만 파괴자'라는 악평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지만 프러포즈는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깝다. 확실한 승낙이 전제되지 않은 깜짝 프러포즈는 흑역사로 남을 위험성을 안고 있다. 상견례 등을 거치고,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예식장 예약까지 마친 뒤 화룡점정의 통과의례가 된 지 오래다. 남자가 하지만 성공 여부는 여자가 판단한다.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이니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도 생길 만하다. 신천 대봉교 데크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에펠탑의 자리에 대백프라자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간 구성도 감안해 프러포즈 데크가 들어서야 할 것이다. MZ 세대 여성들의 조언이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해 보인다.

    2024-06-13 20:14:30

  • [야고부] 어떤 조짐

    [야고부] 어떤 조짐

    남미 아마존에서 서식하다 북미로 올라와 6월 중순 알을 낳는 개똥지빠귀는 허리케인 예보관으로 불린다고 한다. 50g도 안 되는 작은 체구지만 생존과 관련한 비상한 감지력을 갖고 있어서다. 이변이 없다면 2주일 만에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고 어미는 새끼를 충분히 돌본 뒤 7월에 아마존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새끼를 기르다 말고 6월에 아마존으로 가 버리기도 한다. 7월의 허리케인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경우다. 허리케인에 휩쓸려 몰살당하기보다 위험을 피해 일찍 아마존으로 돌아가 다음 번식기를 기다리는 편이 현명할 수 있다. 개똥지빠귀로서는 자신의 현세와 후대의 생을 건 본능적 감각이 요구된다. 그래서인지 인간이 40년 동안 연구한 기압 진동 예측 방식보다 정확하다는 주장이 있다. 6·25전쟁 발발 전 미 육군성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능력은 없을 것으로 봤다. 대규모 남침은 없고 소규모 게릴라전과 소요 사태가 있을 뿐이라고 내다봤다. 북한 인민군이 한국군에 승리를 장담할 만큼 우위에 있지는 않기에 남침은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 한국의 위기는 북한의 침략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요인에서 빚어질 것이라 단언했다. CIA의 판단은 달랐다. 1950년 3월 "인민군은 6월에 남침할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무시됐다. 육군성이 본국에 보고한 기밀문서에는 "소규모의 미군을 한국에 계속 유지하는 것은 한국의 안정에 아주 경미한 심리적 효과만 줄 뿐 철수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판단이 담겼다. 미국이 남침을 방조했다는 억측이 나왔던 배경이다.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6월이다. 자유가 거저 주어진 게 아님을, 자유에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때다. 6·25 남침의 역사적 경험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안타깝게도 근래 우리 군(軍)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일부의 문제가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있다. 그 사이 북한의 도발 방식은 다양해졌다. 서해 GPS 전파 교란,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이어 심리 전략에 포함되는 '오물 풍선' 공습도 있었다. 분명한 신호를 통상적인 것이라 허투루 넘기기엔 뒤따를 희생이 크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지, 상대는 우리의 어떤 약점을 노리는지 알아챌 본능적 감지가 있어야 한다.

    2024-06-04 20:04:42

  • [세풍] 북한의 ‘플라잉 토일렛(Flying Toilet)’

    [세풍] 북한의 ‘플라잉 토일렛(Flying Toilet)’

    아프리카 케냐에는 '플라잉 토일렛(flying toilet)'이라는 게 있다. '하늘을 나는 화장실'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실제로는 비닐봉지에 담긴 똥이 하늘을 나는 것이다. 도시 빈민가나 시골을 중심으로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상하수도 인프라가 정비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냄새 탓에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변소를 만드는데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여성들이 용변을 보러 갔다가 성적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집 안에서 용변을 본 뒤 배설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날려 버리는 바람에 '플라잉 토일렛'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분뇨는 농업국가에서 지력을 높이는 데 귀하게 쓰였다. 19세기 초 일본 오사카의 강과 운하를 오가는 분뇨선(船)은 외국인들의 눈에 희귀한 볼거리였다고 한다. 1776년 무렵 등록된 분뇨선만 2천 척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서양의학을 처음 가르친 유럽인인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의 '에도 참부기행(參府紀行)'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실렸는데 1826년 5월의 일기에는 "오사카에서 특별히 만든 비료선이 온다. 사람들은 이것을 각종 정원수나 곡식에도 뿌리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다. 6~8월에는 대도시 주변 지역이 더러워져 경치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썼다. 1859년 영국 주일공사 러더퍼드 올콕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마을에서 논밭으로 보내는, 뚜껑이 없는 액체 비료통을 운반하는 이들이나 '위험물'이라 할 수 있는 인분뇨를 실은 말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건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고 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1878년 분뇨 취급 규칙을 제정해 똥의 가치를 다섯 등급으로 나눠 값을 매기는 등 체계적으로 다뤘다. 다이묘의 저택에서 나온 건 최상품, 일반 가정은 중등품, 감옥이나 유치장에서 나온 건 최하품이었다. 분뇨가 오물 취급을 받은 건 페스트 유행이 계기였다. 1889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고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페스트가 번지면서다. 1910년 일본 최초의 폐기물 관련 법률인 '오물청소법'이 제정된다. 관에서 오물을 청소하고 깨끗하게 유지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분뇨를 무기로 썼다. 접촉 순간부터 멘털을 무너뜨리는 기괴한 힘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정약용이 외적의 침입이 잦은 접경 지역의 향토방위 전술 전략을 연구한 저술 '민보의(民堡議)'에는 인분 활용안이 적혔다. 요새와 진지에 똥독을 묻어 놓고 똥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똥을 모아 물과 섞어 휘저어 놨다가 대나무통에 넣어 적이 다가오면 얼굴에 쏘는 것이었다. 바가지로 끼얹으면 조준이 정확하지 않고 똥물을 낭비하게 되니 대나무에 넣어 쏘라고 했다. 일명 '분포(糞砲)'다. 살상력은 약했지만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냈다. 설마설마했다. 핵무기로 서로를 위협하는 시대에 북한은 5㎏이 넘는 '오물 풍선' 안에 분변을 넣었다. 우리의 민간단체가 보낸 대북 전단을 쓰레기로 보고, 똑같이 쓰레기를 날려보내 응징한다는 북한식 동태복수(同態復讐)다. 삐라(ビラ, 선전 전단)의 목적은 우월한 체제 선전인데 고전적인 삐라의 형태로 체제 우월성을 홍보할 수 없음을 자인한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다만 우리 내부의 분열을 획책하는 심리 전략은 통한 것 같다. 그러게 왜 대북 전단을 보내서 이런 수모를 겪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오기 마련이다. 마땅한 대응 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2024-06-03 20:04:20

  • [야고부] 설명이 필요해

    [야고부] 설명이 필요해

    1398년 태조의 아들 이방원은 세자인 동생 방석을 죽이면서 정도전의 목도 친다. 1차 왕자의 난이다. 조선 건국 이후 10년도 안 된 때다. 태조 이성계에게서 '儒宗功宗'(유종공종·유학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다)이라는 어필을 받았을 만큼 조선 개국 일등 공신으로 분류됐던 정도전이었다. 1차 왕자의 난을 도운 공신으로 민무구·무질 형제가 꼽힌다. 이방원의 처남이다. 왕위에 오르자 이방원은 이들 형제도 죽인다. 권력을 등에 업은 가벼운 입과 값싼 행동을 이유로 삼았다. 공신 중 숙청된 이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일파 제거로 정사공신에 오른 그는 이방원과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은 관계였다. 태종이 이무를 죽인 건 인사 개입 때문이었다. 우의정이던 이무가 보고하지 않고 인사에 개입해 특정인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준 걸 왕권 위협으로 봤다. 유배를 보내 놓고 뒤쫓아가 참수했다. 왕권 강화의 핵심은 공신도 넘볼 수 없는 인사권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에 머물고 있는 때에 저의가 궁금해지는 인사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으로 기용된 것이다. 민심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임무다. 여론을 읽고 민심의 향배를 가리는 능력에 대통령의 의중을 읽을 줄 아는 코드 적합성이 발탁 기준에 포함된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렇다 해도 자연스러운 인사로 보기 어색한 지점들이 적잖다. 2016년 탄핵 정국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름이 오르내렸던 그는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가져온 국정 농단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에게 기밀 문건을 유출한 혐의 등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당시 수사 검사가 윤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실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자 온갖 설이 부유한다. 상상의 영역에서는 정 비서관의 굳은 심지를 윤 대통령이 탁월하게 봤다는 설부터 당시 수사에 적극 협조한 대가라는 허무맹랑한 설까지 나온다. 가능한 모든 상상적 서사가 결합되며 근자에 소환된 태블릿PC 괴담과 섞여 음모론자들의 이야기 전개에 자극적인 소재가 된다. 더 큰 괴담으로 각색되기 전에 대통령실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2024-05-27 20:07:17

  • [야고부] 도파민 제로 시티

    [야고부] 도파민 제로 시티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박민규 작가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게 세계'라고 썼다. 그는 인상 깊게 본 만화로 '메이드 인 경상도'를 꼽은 적이 있다. 대구 출신 김수박 작가가 송현동, 달성공원 등 대구의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그린 작품이다. 예컨대 1980년 5월의 광주를 대구가 어떻게 인식했는지도 실려 있다. 대구에서는 광주를 알기 어려웠다. 대도시에서 살다 보면 시골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 '메이드 인 경상도'라는 동명의 타이틀로 제작된 유튜브 영상도 그렇게 기획된 듯했다. 구독자 수 30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연재물이다. 최근 경북 영양을 소재로 제작한 이들의 35분짜리 영상이 호된 비판을 받았다. 소멸해 가는 지방 소도시를 조명한다는 기획 의도와 거리가 멀었던 탓이다. 혹평만 늘어놓다 3시간 만에 돌아갔다. '도파민 제로 시티'라는 부제도 붙였다. 이들의 도파민 분출은 음식에서 막혔다. 영양군에서 유명 체인점의 입점을 금지한 게 아님에도 햄버거 체인점이 없다는 둥,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는 둥 다소 공격적인 언행이 이어졌다. 노이즈 마케팅도 홍보라고 우겨본들 모멸감만 커진다. 영양은 산나물의 성지다. 식당에서 산나물 무침 몇 가지는 기본 반찬이다. 알고 갔다면 어수리나물 한 접시쯤은 거뜬히 받았을 것이다. 주로 봄철 어린 순을 먹기에 요즘이 제철이다. 유명 유튜버가 특산물을 알고 왔다면 영업시간 이후라도 금세 무쳐 내 홍보하려 했을 것이다. 영양의 산나물 인심이 그 정도는 된다. 이들은 "지역 명소가 많음에도 한적한 지역이란 콘셉트를 강조해 촬영했고 콘텐츠적 재미를 가져오기 위해 무리한 표현을 사용했다"며 영상을 올린 지 일주일 만에 사과했다. 개그맨이 직업적 굴욕을 맛볼 때는 못 웃겼을 때다. 자료 조사가 부실하면 콘텐츠는 부실해진다. 콘텐츠 하나에 몇 날 며칠 기획 회의를 거치고 애쓰는 유튜버들의 악전고투를 익히 들은 터라 기이하고 놀랍다.

    2024-05-19 18:59:19

  • [야고부] “기자들은 불렀나?”

    [야고부] “기자들은 불렀나?”

    "여기 성당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 있나. 오해하지 말고 들어.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소식을 열두 제자들이 미리 알고 모였어.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하늘에서 예수님이 지상으로 슥 내려오신 거야. 근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했던 첫마디가 뭐였는지 알아? 기자들은 불렀나?" 20년 전 고위공무원에게 들은 얘기다. 하고 싶은 얘기를 널리 퍼트릴 수 있는 마이크 역할을 했던 언론을 잘 활용하는 게 능력이던 시절이다. 지금이야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등 여러 채널이 있지만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기자회견이었다. 회견의 형식은 묻고 답하기가 대전제다. 하지만 압도적 흡인력이 있다면 다소 일방적이어도 괜찮다. 2시간이 넘는 일방적 토설에 가까웠지만,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회견은 근래에 드문 회견 방식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평상복 차림, 모자까지 눌러쓰고 나왔다. 겉모습은 부차적이었다. 시종일관 말을 쉬지 않았는데 알아듣기 쉬웠다. 간간이 섞인 욕설도 상스럽다기보다 억울해 팔짝 뛸 듯한 친구의 하소연처럼 들리게 했다. 일부는 2008년 나훈아의 회견을 떠올렸다. 일본 야쿠자와 연하의 여배우 이름이 뒤섞이며 퍼진 낭설이 정설로 둔갑하자 본인이 등판한 것이었다. 책상 위에 올라서서 바지춤을 잡은 건 파격적이었다. 기자회견의 본질은 항변권 확보다. 뭐든 양쪽의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자들을 모으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세상이다. 유명 연예인 등 셀럽들은 소셜 미디어를 십분 활용한다. 일일이 보도 자료를 뿌릴 필요가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표적이다. '홍카콜라'를 비롯한 소통 채널들을 언론이 일상적으로 주시한다. 진중권 교수에게도 한때 그랬다. 몇 줄의 메시지가 기사로 소개될 만큼 파급력이 있었다. 명확한 메시지는, 팩트만 확실하다면,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팩트만 줄줄 나열해 놔도 가독성 높은 기사가 된다는 게 언론의 오랜 신념이다. 문체와 구성 등 여러 요소로 승부하는 문학과 다르다. 대통령의 회견도 그렇다. 국민들이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면 어떤 형식이든 좋다. 순도 높은 진심이면 국민들도 알아챌 것이기 때문이다.

    2024-05-09 20:01:29

  • [세풍] 군 면제? “너 뭐 돼?”

    [세풍] 군 면제? “너 뭐 돼?”

    기원전 221년 중국 첫 통일왕조 진(秦)이 통일 직후 먼저 실시한 것 중 하나는 도량형 통일이었다. 길이의 도(度), 부피의 량(量), 무게의 형(衡)은 공정의 상징이었다. 세제(稅制)의 근본이 되는 단위를 통일하지 못하면 각종 민란의 원인이 될 게 뻔했다. 공정에 민감한 건 어느 시대나 비슷하다. 2천 년 뒤인 1789년 프랑스혁명 후에도 국민들은 도량형 통일을 가장 반겼다고 한다. 미터법을 제안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도량형의 난맥상이 정신을 혼란시키며 상거래를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준은 특혜 여지를 없앤다. 예외 없이 군 복무를 했던 과거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프로 스포츠 스타들이 군에 입대했다. 메이저리그 전설의 4할 타자 테드 윌리암스를 비롯해 숱한 선수들이 이역만리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에 참전했고 제대 후 다시 그라운드를 밟았다. 강군의 전력을 유지한 배경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상 획득 등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는 건 합법이다. 월드컵 4강 진출이 군 면제 혜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드디어 정부가 체육·예술 요원을 포함하는 병역 특례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기식 병무청장은 병역 특례가 도입 당시와 비교해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다며 개편 방침을 밝혔다. 1973년 대한민국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때 시행된 제도였다. 50년이 지난 이상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포츠의 경우 일부 경기 참여로 혜택을 챙기기도 해 형평성 논란이 불거졌던 터였다.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이 저조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국제 스포츠 대회 입상이 국위 선양과 직결되는 시대는 지났다.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충분하다. 메달 하나 덜 따낸다고 존재감이 옅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병역 자원 추이가 염려스러운 지경이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23만 명. 남녀를 절반으로 나눈다면 20년 뒤 군 복무 가능 자원은 10만 명 남짓에 불과하다. 군대에 가면 능력이 사장될지 모른다는 불안도 과도한 측면이 있다. 우리 군이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군 복무 이후 기량이 늘어난 이들도 적잖다. 뜻밖의 재능을 찾아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입대 연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세계적 팬덤의 BTS 멤버들도 입대했다. 국위 선양에 이보다 더 우위에 있을 만한 이가 있나 되물어도 이상할 게 없다. 가장 먼저 입대한 멤버 '진'은 다음 달 제대한다. 복무 기간도 18개월로 길다고 보기 어렵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국제 대회 84연승의 일본 유도 간판 스타 다무라 료코(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이승엽과 함께 활약한 다니 요시토모의 부인, 남편의 성을 따라 현재 이름은 다니 료코)를 꺾고, '일본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단 하나의 금메달만 딴다면 그건 다무라 료코일 것'이라 했던 일본 언론을 합죽이로 만든 17세의 북한 계순희는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10대 소년이 무적의 일본 선수를 꺾고 드라마 같은 승리로 금메달을 따 국민적 감동을 안겼을지라도 평등한 군역이 실현돼야 할 때가 왔다. 영원불변한 군역 기준은 없다. 북한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군 면제를 바란다면 요즘 MZ 세대의 표현 "너, 뭐 돼?"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4-05-06 20:03:23

  • [야고부] 돌팔이 전성시대의 조건

    [야고부] 돌팔이 전성시대의 조건

    1673년 몰리에르는 '상상병 환자'에서 건강이 좋지 않을 때 관장으로 모든 걸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겨 그에 매달리는 사회적 현상을 풍자했다. 의사에게 부종이나 병든 폐, 만성질환을 어떻게 치료할지 물어보면 "관장을 하고, 피를 뽑고, 그다음에는 설사를 하게 한다"는 한결같은 대답만 있었다. 2세기 때 명의(名醫) 갈레노스의 '4체액설(혈액, 흑담즙, 황담즙, 점액)'은 19세기까지 통했다. 체액 불균형이 질병을 부른다는 주장이었다. 처방법은 입과 항문으로 체액을 배출하는 거였다. 말년에 대장암 투병을 했던 철완 최동원도 소금물 관장에 기대를 걸었던 듯하다. 그에게 소금물 관장을 강권한 이는 종교인이었다. 물론 그에게 의료 면허는 없었다. 폐암에 좋다며 펜벤다졸을 못 구해 야단이던 때가 있었다. 펜벤다졸은 강아지 구충제다. 자폐증이나 말기 암에는 현대의학도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수많은 돌팔이 의료 행위가 틈입하는 경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환자와 가족들이다. 100명 중 1명, 단 1%만 치료 효과를 봤다 해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걸 보게 된다. 호전된 소식을 복음처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말기 암 환자가 기적의 생존법을 소개할 때는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친다. 숱한 부작용보다 적시성이 더 강조된다. 특이한 입소문이 유력한 정설로 변환할 기회를 챙기는 것이다. 의대 교수들의 사직 릴레이, 주 1회 휴진 확대가 결정됐다. 암 환자와 가족들의 심정은 타들어 간다. 의사에겐 여러 수술 중 하나겠지만 환자는 일생일대의 수술이다. 생멸의 시간이 의사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침착하게 수술 날짜를 기다리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본다. 의사들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는 돌팔이들에게도 눈길이 간다.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 라포르(Rapport)는 인술(仁術)에서 온다. 여기에는 공감력도 포함된다. 힘들 때 손잡아 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오래된 방식이다.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의사들의 부재를 절감하며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환자와 눈을 마주치며 현실을 설득하는 건 어땠을까. 못내 아쉬워지는, 가만한 나날이 아직 이어지고 있다.

    2024-04-30 20:07:50

  • [야고부] 정치하는 대통령

    [야고부] 정치하는 대통령

    노벨문학상 수상작치고 대중적 찬사를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회적 울림이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작품인 데다 발랄하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체를 쓰는 경우가 드물어서다. 오죽하면 독자를 빨리 잠들게 하는 순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까. 지겹고 어려운 문장들을 마주할 용기는 독서 모임에 나가 여럿이 함께해야만 생겨난다는 자조도 있다. 김희선 작가의 단편소설 '18인의 노인들'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 선정 과정에 의문을 품은 주인공이 몰래 심사장에 숨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 노인 18명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들이 토끼였다는 것이다. 실제 노벨문학상 수상자 120명의 작품 모두가 흥미와 거리를 둔 건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갓 들어온 초임 기자에게 주문하는 것 중에는 '읽기 쉬운 글'이 있다. 독자의 문해력을 시험하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사회적 파장이 세도 읽히지 않으면 무소용이다. 단문으로 써 내려가라는 조언이 붙는다. 김애란 작가는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 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고 했지만 꾸밈말을 줄이는 게 잘 읽히는 기사의 요건이다. 독자층을 감안하지 않으면 쉽게 써도 읽히지 않는다. 관심 분야 밖에 있으니 간택될 리 없다. 투병 중인 이가 색조 화장품 사용법 기사를 읽는다면 기사를 쓴 기자가 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은, 논문 수준이라 해도 꼼꼼히 읽는 것은 질환 치유와 관련 있는 섭생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참모들에게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께 친근하게 다가가는 대통령이 돼야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원래 정치하는 사람인데 이제야 뭐라도 하겠다는 이야기냐"며 비아냥댄다. 지금 국민들이 읽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민생 관련 콘텐츠다. 총선에서 야당에 압승을 안긴 요인이 민생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알아듣기 쉽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민생 대책이 먼저다. 국민은 어렵게 이야기해도 옳게 이해할 준비가 돼 있다.

    2024-04-22 20:00:00

  • [야고부] 김준혁의 ‘보바리슴’

    [야고부] 김준혁의 ‘보바리슴’

    1992년은 한 편의 소설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선 해였다.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쓴 '즐거운 사라'가 부른 외설 논란이었다. 논문과 책으로 연구 결과물을 입증하는 학자로서 품위도 문제 삼았다. 음란 문서 여부 판단은 법원의 몫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은 최고조에 올랐다. 하지만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성적(性的) 판타지보다 성적 수치심을 자극했다. 문체도 거칠었다. 1856년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내놓은 '마담 보바리'는 고전의 반열에 있다. 이 작품도 19세기 중엽 외설 논란에 휩싸여 작가가 법정에 서야 했다. 내면의 기아에 허덕인 유부녀 에마 보바리가 주변 남성들과 대범하게 애정 행각을 이어가다 파멸에 이르는 내용이다. 작품에서 배태된 개념이 '보바리슴(bovarysme)'이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을 실제 자아로 여기는 심리 상태로 풀이한다. 작가는 기록을 중심에 둔 역사서라 주장하지만 소설로 보이는 책이 있다. 22대 총선 당선인 한신대 김준혁 교수의 '김준혁 교수가 들려주는 변방의 역사'다. 총선 과정에서 책 내용 일부와 유튜브에서 한 여러 발언들이 문제시됐다. 이대생 성 상납, 박정희 성 추문, 친일의 역사에서 시작된 유치원, 퇴계의 성생활까지 폭도 넓었다. 역사학자라는 이가 감당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주목할 부분은 '저자의 말'에서 보인 비장함이다. 그는 "분명히 이야기하건데 나는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사처럼 들렸더라도 단연코 정확한 그 시대의 역사이고, 그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라고 했다. 또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를 단재 신채호의 말이라 인용하며 "온갖 권력을 누리는 악인들에게 반드시 하늘이 응징할 것이라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마담 보바리'가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약 500년 전 퇴계는 조정으로 나와 달라는 임금의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했다. 후학 양성에 진심이었다. 교수 김준혁에게 후학 양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음 달 30일이면 법을 만들고 국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국민의 이름으로 부여받는 그다. 악인으로 분류한 이들을 어찌 응징할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기록을 가장한 상상이 진영 논리 앞에서 면책될 수 있음을 이참에 확실히 알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천을 유지한 책임을 부디 다하길 바란다.

    2024-04-14 20:38:13

  • [세풍] 대통령 탄핵, 빈말이 아니다

    [세풍] 대통령 탄핵, 빈말이 아니다

    1987년 7월 김영삼(YS)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자신했다. 이미 김대중(DJ)은 불출마 선언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기자들은 DJ가 출마 의사를 밝힐 것으로 봤다. 1971년 대선의 전례도 끌고 왔다. YS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지만 단일화에 실패했다. 지역 맹주 네 명이 모두 출마하면 승산이 있다는 '4자 필승론'으로 희망 회로가 작동한 탓도 컸다. YS와 DJ는 각각 28%, 27%의 득표율로 노태우(36.6%)에게 패했다. 단일화가 선거의 전범(典範)이 된 순간이었다. 단일화의 위력은 컸다. 1997년 대선에서 접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이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한 이인제의 출마와 시너지효과를 내며 대세이던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2002년 대선은 후보 등록 전날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원샷 합의로 마무리되며 노무현이 당선됐다. 낙선한 건 문재인·안철수의 2012년 대선이 유일했다. 막바지로 향하는 총선 구도가 살얼음판이다. 득표율 5%포인트(총투표수를 10만 표로 치면 5천 표) 내의 접전으로 점쳐지는 곳이 50곳 이상이다. 사전투표율 31.3%로 투표 의향이 있는 유권자 절반 가까이가 투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대세가 기울면 끝나는 싸움이 선거라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치는 생물이다. 단일화는 사전투표 기간에도 진행됐다. 울산남구갑 무소속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했다. 무소속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 중 누가 근소하게나마 앞선다 할 수 없을 만큼 초박빙이었다. 국민의힘 공천 신청을 했다 떨어진 무소속 후보가 내린 결단이었다. 야권 지지세가 결집할 수 있지만 산술적으로 범보수 단일화 효과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일화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야당이 목소리를 키우는 대통령 탄핵이 빈말이 아닌 탓이다.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후보를 비롯해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이들 상당수가 탄핵을 벼르고 있다. 조국혁신당과 소나무당은 아예 당론이라 밝혔다. 탄핵이 진심으로 보인다. 대통령 부재의 혼란을 다시 겪는다는 건 국민적 불행이다.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든 박근혜였든 마찬가지였다. 현재로선 범야권 200석 확보가 희망 사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판세 분석이 설득력을 키우고 있다. 실현된다면 개헌과 탄핵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없게 된다. 총선 이후 범야권이 탄핵을 작정한다면 이유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다. 범보수 후보들이 단일화를 냉정하게 볼 이유다. 한 자릿수 지지율의 후보도 마찬가지다. 범야권은 일찌감치 단일화 경선 등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경기 지역만 18곳이다. 끝이 아니다. 불리한 판세로 보이는 창원성산에서는 녹색정의당과 민주당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도 남아 있다. 단일화는 승리로 가는 확실한 선거 전략이기 때문이다. 단일화를 굴복이나 투항으로 볼 게 아니다. 전략적 제휴로 봐야 한다. 미미한 득표율로 패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생명 단축을 부채질할 뿐이다. 지난 총선에서 1% 남짓한 득표율을 얻은 진보당을 보라. 더불어민주연합으로 비례 연대에 나선 걸 민주당에 굴복했다 본다면 순진하다는 말을 들어도 싸다.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이면 과수농가는 바빠진다. 꽃을 따내는 적화(摘花)를 거쳐야 과실로 갈 영양분이 많아진다. 꽃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영글어 갈 사과 과실에 도움을 못 준다. 금사과는 그렇게 우리에게 온다.

    2024-04-08 19:59:22

  • [야고부] 미래를 알고 싶다면

    [야고부] 미래를 알고 싶다면

    반명함판 사진과 간단한 이력만 소개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도 아닌데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심야에 1시간 남짓 이어진 프로그램은 총선 비례대표 후보 모두를 보여준 뒤 끝났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배부한 공보물에 없는 정당도, 이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38개 정당, 253명이었다. 4년 전 35개보다 3개 늘었다. 정당들의 구애(求愛)는 여전하다. 구애 기간이 못내 아쉽다. 얼마 뒤 51㎝ 길이의 투표용지에서 마주할 이름들인데 돌아서니 가물가물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는 건 더 큰 골칫거리다. '다음 기회에 고르자'거나 '안 고를란다'도 가능한 선택지지만, 내 의사와 무관한 이가 '국민의 대표'로 선발된다는 게 함정이다. 무조건 누군가는 뽑힌다. 이번 총선의 만 18~19세 유권자 수는 89만5천여 명, 20대는 611만8천여 명이다. 전체 유권자 수의 16%에 육박한다. 그런데 총선 관심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선관위가 지난주 실시한 유권자 의식 조사를 보면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응답한 전체 유권자는 76.5%였다. 반면 만 18~29세는 52.3%, 30대는 65.8%에 그쳤다. 30세 미만 청년층 두 명 중 한 명은 투표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들의 낮은 관심은 빈약한 청년 관련 공약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상가상 네거티브 선거전도 강화됐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이 십분 이해된다. 다만 이는 정치인들이 처절하게 반성할 대목이지 투표권 포기의 이유는 못 된다. 24만 표 남짓으로 대통령이 결정된 게 불과 이태 전이다. 청년층 표심은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고, 불편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만한 것인 줄 안다. 선거는 결혼 상대를 찾는 것과 다른 영역에 있다. 투표 불참 의향은 결코 반영되지 않는다. 투표율이 30%에 불과해도 당선자는 나온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하고 최악만이 있다면 차악을 찾아내야 한다. 대한민국이 당연하게 여기는 직선제는 국민의 피땀으로 쟁취해 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목소리는 국가 정책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미래를 알고 싶다면 투표장으로 향하면 된다. 주권 행사로 갖게 될 청량감을 권한다. 기왕이면 덕업상권의 정신도 살려서.

    2024-04-04 20:02:09

  • [야고부] 공천 프레이밍

    [야고부] 공천 프레이밍

    올해부터 프로야구에 도입된 ABS(Automatic Ball-Strike System·자동볼판정시스템), 일명 '로봇 심판'이 야구사의 일대 전환을 불러오고 있다. 포수의 위치, 포구 방식과 무관하다. 스트라이크 존(Zone)을 통과하면 스트라이크다. 자의든 타의든 심판이 경기 흐름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여태껏 들쭉날쭉하던 판정이 잦았던 터다. 자의적 판정 영역이 사라지자 항의가 급감했다. 스트라이크 세 개에 물러나야 하는 타자, 볼 네 개면 루(壘)를 헌납해야 하는 투수 모두 판정에 신뢰를 보인다. 인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정확성은 91% 수준이었다. 선발투수가 한 경기에 100개의 공을 던진다 치면 9개의 판정이 심판 재량으로 달라진 셈이다. 야구의 본고장 MLB 사무국이 ABS 도입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까닭이다. 포수 '프레이밍'(Framing)의 영향력도 없어졌다. 잽싸게 포구 위치를 바꿔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떨어지는 공을 잡아 올리려 한쪽 무릎을 굽히고, 팔을 앞으로 쭉 뻗기 일쑤였다. 심판을 속이려는 노력은 기록과 불가분의 관계다. 포수 평가 지표에는 '프레이밍 RAA(Runs Above Average)'도 있다. 볼을 스트라이크로 만들었을 때 줄인 실점을 수치화한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 탓에 가능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바꿔낸 선수는 아티스트급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성기를 이끌던 투수 톰 글래빈은 공을 반 개씩 바깥쪽으로 빼며 존을 넓혔다. 삼성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양준혁을 향한 찬사 중에는 "풀 카운트에서 그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말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천은 프레이밍을 알고도 속아 주는 심판을 보는 듯했다. 비명 현역 의원들을 배제할 때 특히 그랬다. 압권은 서울 강북을 공천이었다. 현역 박용진 의원의 자객을 자임하며 등판한 후보, 중도 탈락한 그를 대신한 후보 모두에게 민주당은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감정이 들어간 판정으로 보였으나 시스템 공천이라고 반박했다. 최근 불거진 갭 투기 의혹과 공천의 상관성도 뒤죽박죽이다. 판정은 심판 고유의 영역이라지만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일관성 없는 판정은 경기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2024-03-26 20:09:14

  • [야고부] 본능적 실언

    [야고부] 본능적 실언

    2019년 프랑스 공군은 드론을 격추할 묘책으로 검독수리 부대를 창설했다. 삼총사에서 따온 달타냥, 아라미스, 아토스, 포르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 마리의 저격수들은 고깃덩어리가 붙은 드론을 낚아채는 훈련을 받았다. 2016년 네덜란드에서 진행한 같은 프로젝트는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수리들이 배가 부를 때는 드론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본능'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환점을 찍은 무기 중 하나는 드론이었다. 공중에서 벌 떼 소리가 들리면 러시아군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카메라 장착으로 탐지 기능뿐 아니라 폭탄 낙하 임무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드론은 러시아 대선 기간에도 수도 모스크바로 침투했다. 크렘린 금박 지붕의 반짝임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송장까마귀 떼 퇴치용으로 참매를 활용했던 러시아였지만 드론에는 쩔쩔맸다. 총선 공천과 관련해 정치인들의 실언이 연일 뭇매를 맞는 중이다. 대중 연설이나 인터뷰가 '정치 본능' 실연(實演)의 충실한 통로인 시대는 아닌 것이다. 소통을 빌미로 소셜미디어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몇십 년 전 언사까지 모조리 소환된다. 그렇게 쌓이고 모인 실언이 정돈돼 정적(政敵)의 무기가 된다. 그럼에도 일부는 저돌적인 정치 본능을 드러낸다. 실언과 설화로 고역을 치르더라도 지지 세력의 결집을 끌어낼 수 있다. 실언은 우리 편에 직언으로 변환돼 '열혈 투사' 옹립으로 이어진다. 같은 사람이 잦은 실언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까닭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카메라 앞에서 "설마 2찍? 2찍은 아니겠지?"나 "살 만하다, 견딜 만하다 싶으면 가서 열심히 2번을 찍든지 아니면 집에서 쉬십시오"라 한 건 본능적 실언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본능적 'ㅉ'(쌍지읒) 애착을 말릴 순 없지만 공천 잡음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때에 성동격서식 실언은 효용성이 높다. 지지자들이 만든 홍보물도 닮았다. 서울 동작을에 출마하는 자당 후보의 사진 옆에 '나베를 밟아버릴 강력한 후보' '냄비는 밟아야 제맛'이라는 문구를 붙였다. 나베는 일본어로 '냄비'를 뜻한다.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다. '개딸'들은 오랜 기간 나경원 후보를 '나베'라 칭했다. 성 인지 감수성과 인권을 투쟁 구호처럼 부르짖던 이들이 맞나 싶다.

    2024-03-18 20: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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