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논설위원 nove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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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고부] 정치하는 대통령

    [야고부] 정치하는 대통령

    노벨문학상 수상작치고 대중적 찬사를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회적 울림이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작품인 데다 발랄하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체를 쓰는 경우가 드물어서다. 오죽하면 독자를 빨리 잠들게 하는 순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까. 지겹고 어려운 문장들을 마주할 용기는 독서 모임에 나가 여럿이 함께해야만 생겨난다는 자조도 있다. 김희선 작가의 단편소설 '18인의 노인들'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 선정 과정에 의문을 품은 주인공이 몰래 심사장에 숨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 노인 18명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들이 토끼였다는 것이다. 실제 노벨문학상 수상자 120명의 작품 모두가 흥미와 거리를 둔 건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갓 들어온 초임 기자에게 주문하는 것 중에는 '읽기 쉬운 글'이 있다. 독자의 문해력을 시험하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사회적 파장이 세도 읽히지 않으면 무소용이다. 단문으로 써 내려가라는 조언이 붙는다. 김애란 작가는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 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고 했지만 꾸밈말을 줄이는 게 잘 읽히는 기사의 요건이다. 독자층을 감안하지 않으면 쉽게 써도 읽히지 않는다. 관심 분야 밖에 있으니 간택될 리 없다. 투병 중인 이가 색조 화장품 사용법 기사를 읽는다면 기사를 쓴 기자가 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은, 논문 수준이라 해도 꼼꼼히 읽는 것은 질환 치유와 관련 있는 섭생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참모들에게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께 친근하게 다가가는 대통령이 돼야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원래 정치하는 사람인데 이제야 뭐라도 하겠다는 이야기냐"며 비아냥댄다. 지금 국민들이 읽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민생 관련 콘텐츠다. 총선에서 야당에 압승을 안긴 요인이 민생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알아듣기 쉽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민생 대책이 먼저다. 국민은 어렵게 이야기해도 옳게 이해할 준비가 돼 있다.

    2024-04-22 20:00:00

  • [야고부] 김준혁의 ‘보바리슴’

    [야고부] 김준혁의 ‘보바리슴’

    1992년은 한 편의 소설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선 해였다.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쓴 '즐거운 사라'가 부른 외설 논란이었다. 논문과 책으로 연구 결과물을 입증하는 학자로서 품위도 문제 삼았다. 음란 문서 여부 판단은 법원의 몫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은 최고조에 올랐다. 하지만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성적(性的) 판타지보다 성적 수치심을 자극했다. 문체도 거칠었다. 1856년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내놓은 '마담 보바리'는 고전의 반열에 있다. 이 작품도 19세기 중엽 외설 논란에 휩싸여 작가가 법정에 서야 했다. 내면의 기아에 허덕인 유부녀 에마 보바리가 주변 남성들과 대범하게 애정 행각을 이어가다 파멸에 이르는 내용이다. 작품에서 배태된 개념이 '보바리슴(bovarysme)'이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을 실제 자아로 여기는 심리 상태로 풀이한다. 작가는 기록을 중심에 둔 역사서라 주장하지만 소설로 보이는 책이 있다. 22대 총선 당선인 한신대 김준혁 교수의 '김준혁 교수가 들려주는 변방의 역사'다. 총선 과정에서 책 내용 일부와 유튜브에서 한 여러 발언들이 문제시됐다. 이대생 성 상납, 박정희 성 추문, 친일의 역사에서 시작된 유치원, 퇴계의 성생활까지 폭도 넓었다. 역사학자라는 이가 감당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주목할 부분은 '저자의 말'에서 보인 비장함이다. 그는 "분명히 이야기하건데 나는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사처럼 들렸더라도 단연코 정확한 그 시대의 역사이고, 그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라고 했다. 또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를 단재 신채호의 말이라 인용하며 "온갖 권력을 누리는 악인들에게 반드시 하늘이 응징할 것이라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마담 보바리'가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약 500년 전 퇴계는 조정으로 나와 달라는 임금의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했다. 후학 양성에 진심이었다. 교수 김준혁에게 후학 양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음 달 30일이면 법을 만들고 국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국민의 이름으로 부여받는 그다. 악인으로 분류한 이들을 어찌 응징할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기록을 가장한 상상이 진영 논리 앞에서 면책될 수 있음을 이참에 확실히 알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천을 유지한 책임을 부디 다하길 바란다.

    2024-04-14 20:38:13

  • [세풍] 대통령 탄핵, 빈말이 아니다

    [세풍] 대통령 탄핵, 빈말이 아니다

    1987년 7월 김영삼(YS)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자신했다. 이미 김대중(DJ)은 불출마 선언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기자들은 DJ가 출마 의사를 밝힐 것으로 봤다. 1971년 대선의 전례도 끌고 왔다. YS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지만 단일화에 실패했다. 지역 맹주 네 명이 모두 출마하면 승산이 있다는 '4자 필승론'으로 희망 회로가 작동한 탓도 컸다. YS와 DJ는 각각 28%, 27%의 득표율로 노태우(36.6%)에게 패했다. 단일화가 선거의 전범(典範)이 된 순간이었다. 단일화의 위력은 컸다. 1997년 대선에서 접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이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한 이인제의 출마와 시너지효과를 내며 대세이던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2002년 대선은 후보 등록 전날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원샷 합의로 마무리되며 노무현이 당선됐다. 낙선한 건 문재인·안철수의 2012년 대선이 유일했다. 막바지로 향하는 총선 구도가 살얼음판이다. 득표율 5%포인트(총투표수를 10만 표로 치면 5천 표) 내의 접전으로 점쳐지는 곳이 50곳 이상이다. 사전투표율 31.3%로 투표 의향이 있는 유권자 절반 가까이가 투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대세가 기울면 끝나는 싸움이 선거라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치는 생물이다. 단일화는 사전투표 기간에도 진행됐다. 울산남구갑 무소속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했다. 무소속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 중 누가 근소하게나마 앞선다 할 수 없을 만큼 초박빙이었다. 국민의힘 공천 신청을 했다 떨어진 무소속 후보가 내린 결단이었다. 야권 지지세가 결집할 수 있지만 산술적으로 범보수 단일화 효과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일화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야당이 목소리를 키우는 대통령 탄핵이 빈말이 아닌 탓이다.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후보를 비롯해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이들 상당수가 탄핵을 벼르고 있다. 조국혁신당과 소나무당은 아예 당론이라 밝혔다. 탄핵이 진심으로 보인다. 대통령 부재의 혼란을 다시 겪는다는 건 국민적 불행이다.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든 박근혜였든 마찬가지였다. 현재로선 범야권 200석 확보가 희망 사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판세 분석이 설득력을 키우고 있다. 실현된다면 개헌과 탄핵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없게 된다. 총선 이후 범야권이 탄핵을 작정한다면 이유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다. 범보수 후보들이 단일화를 냉정하게 볼 이유다. 한 자릿수 지지율의 후보도 마찬가지다. 범야권은 일찌감치 단일화 경선 등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경기 지역만 18곳이다. 끝이 아니다. 불리한 판세로 보이는 창원성산에서는 녹색정의당과 민주당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도 남아 있다. 단일화는 승리로 가는 확실한 선거 전략이기 때문이다. 단일화를 굴복이나 투항으로 볼 게 아니다. 전략적 제휴로 봐야 한다. 미미한 득표율로 패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생명 단축을 부채질할 뿐이다. 지난 총선에서 1% 남짓한 득표율을 얻은 진보당을 보라. 더불어민주연합으로 비례 연대에 나선 걸 민주당에 굴복했다 본다면 순진하다는 말을 들어도 싸다.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이면 과수농가는 바빠진다. 꽃을 따내는 적화(摘花)를 거쳐야 과실로 갈 영양분이 많아진다. 꽃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영글어 갈 사과 과실에 도움을 못 준다. 금사과는 그렇게 우리에게 온다.

    2024-04-08 19:59:22

  • [야고부] 미래를 알고 싶다면

    [야고부] 미래를 알고 싶다면

    반명함판 사진과 간단한 이력만 소개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도 아닌데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심야에 1시간 남짓 이어진 프로그램은 총선 비례대표 후보 모두를 보여준 뒤 끝났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배부한 공보물에 없는 정당도, 이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38개 정당, 253명이었다. 4년 전 35개보다 3개 늘었다. 정당들의 구애(求愛)는 여전하다. 구애 기간이 못내 아쉽다. 얼마 뒤 51㎝ 길이의 투표용지에서 마주할 이름들인데 돌아서니 가물가물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는 건 더 큰 골칫거리다. '다음 기회에 고르자'거나 '안 고를란다'도 가능한 선택지지만, 내 의사와 무관한 이가 '국민의 대표'로 선발된다는 게 함정이다. 무조건 누군가는 뽑힌다. 이번 총선의 만 18~19세 유권자 수는 89만5천여 명, 20대는 611만8천여 명이다. 전체 유권자 수의 16%에 육박한다. 그런데 총선 관심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선관위가 지난주 실시한 유권자 의식 조사를 보면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응답한 전체 유권자는 76.5%였다. 반면 만 18~29세는 52.3%, 30대는 65.8%에 그쳤다. 30세 미만 청년층 두 명 중 한 명은 투표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들의 낮은 관심은 빈약한 청년 관련 공약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상가상 네거티브 선거전도 강화됐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이 십분 이해된다. 다만 이는 정치인들이 처절하게 반성할 대목이지 투표권 포기의 이유는 못 된다. 24만 표 남짓으로 대통령이 결정된 게 불과 이태 전이다. 청년층 표심은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고, 불편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만한 것인 줄 안다. 선거는 결혼 상대를 찾는 것과 다른 영역에 있다. 투표 불참 의향은 결코 반영되지 않는다. 투표율이 30%에 불과해도 당선자는 나온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하고 최악만이 있다면 차악을 찾아내야 한다. 대한민국이 당연하게 여기는 직선제는 국민의 피땀으로 쟁취해 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목소리는 국가 정책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미래를 알고 싶다면 투표장으로 향하면 된다. 주권 행사로 갖게 될 청량감을 권한다. 기왕이면 덕업상권의 정신도 살려서.

    2024-04-04 20:02:09

  • [야고부] 공천 프레이밍

    [야고부] 공천 프레이밍

    올해부터 프로야구에 도입된 ABS(Automatic Ball-Strike System·자동볼판정시스템), 일명 '로봇 심판'이 야구사의 일대 전환을 불러오고 있다. 포수의 위치, 포구 방식과 무관하다. 스트라이크 존(Zone)을 통과하면 스트라이크다. 자의든 타의든 심판이 경기 흐름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여태껏 들쭉날쭉하던 판정이 잦았던 터다. 자의적 판정 영역이 사라지자 항의가 급감했다. 스트라이크 세 개에 물러나야 하는 타자, 볼 네 개면 루(壘)를 헌납해야 하는 투수 모두 판정에 신뢰를 보인다. 인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정확성은 91% 수준이었다. 선발투수가 한 경기에 100개의 공을 던진다 치면 9개의 판정이 심판 재량으로 달라진 셈이다. 야구의 본고장 MLB 사무국이 ABS 도입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까닭이다. 포수 '프레이밍'(Framing)의 영향력도 없어졌다. 잽싸게 포구 위치를 바꿔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떨어지는 공을 잡아 올리려 한쪽 무릎을 굽히고, 팔을 앞으로 쭉 뻗기 일쑤였다. 심판을 속이려는 노력은 기록과 불가분의 관계다. 포수 평가 지표에는 '프레이밍 RAA(Runs Above Average)'도 있다. 볼을 스트라이크로 만들었을 때 줄인 실점을 수치화한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 탓에 가능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바꿔낸 선수는 아티스트급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성기를 이끌던 투수 톰 글래빈은 공을 반 개씩 바깥쪽으로 빼며 존을 넓혔다. 삼성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양준혁을 향한 찬사 중에는 "풀 카운트에서 그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말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천은 프레이밍을 알고도 속아 주는 심판을 보는 듯했다. 비명 현역 의원들을 배제할 때 특히 그랬다. 압권은 서울 강북을 공천이었다. 현역 박용진 의원의 자객을 자임하며 등판한 후보, 중도 탈락한 그를 대신한 후보 모두에게 민주당은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감정이 들어간 판정으로 보였으나 시스템 공천이라고 반박했다. 최근 불거진 갭 투기 의혹과 공천의 상관성도 뒤죽박죽이다. 판정은 심판 고유의 영역이라지만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일관성 없는 판정은 경기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2024-03-26 20:09:14

  • [야고부] 본능적 실언

    [야고부] 본능적 실언

    2019년 프랑스 공군은 드론을 격추할 묘책으로 검독수리 부대를 창설했다. 삼총사에서 따온 달타냥, 아라미스, 아토스, 포르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 마리의 저격수들은 고깃덩어리가 붙은 드론을 낚아채는 훈련을 받았다. 2016년 네덜란드에서 진행한 같은 프로젝트는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수리들이 배가 부를 때는 드론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본능'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환점을 찍은 무기 중 하나는 드론이었다. 공중에서 벌 떼 소리가 들리면 러시아군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카메라 장착으로 탐지 기능뿐 아니라 폭탄 낙하 임무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드론은 러시아 대선 기간에도 수도 모스크바로 침투했다. 크렘린 금박 지붕의 반짝임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송장까마귀 떼 퇴치용으로 참매를 활용했던 러시아였지만 드론에는 쩔쩔맸다. 총선 공천과 관련해 정치인들의 실언이 연일 뭇매를 맞는 중이다. 대중 연설이나 인터뷰가 '정치 본능' 실연(實演)의 충실한 통로인 시대는 아닌 것이다. 소통을 빌미로 소셜미디어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몇십 년 전 언사까지 모조리 소환된다. 그렇게 쌓이고 모인 실언이 정돈돼 정적(政敵)의 무기가 된다. 그럼에도 일부는 저돌적인 정치 본능을 드러낸다. 실언과 설화로 고역을 치르더라도 지지 세력의 결집을 끌어낼 수 있다. 실언은 우리 편에 직언으로 변환돼 '열혈 투사' 옹립으로 이어진다. 같은 사람이 잦은 실언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까닭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카메라 앞에서 "설마 2찍? 2찍은 아니겠지?"나 "살 만하다, 견딜 만하다 싶으면 가서 열심히 2번을 찍든지 아니면 집에서 쉬십시오"라 한 건 본능적 실언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본능적 'ㅉ'(쌍지읒) 애착을 말릴 순 없지만 공천 잡음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때에 성동격서식 실언은 효용성이 높다. 지지자들이 만든 홍보물도 닮았다. 서울 동작을에 출마하는 자당 후보의 사진 옆에 '나베를 밟아버릴 강력한 후보' '냄비는 밟아야 제맛'이라는 문구를 붙였다. 나베는 일본어로 '냄비'를 뜻한다.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다. '개딸'들은 오랜 기간 나경원 후보를 '나베'라 칭했다. 성 인지 감수성과 인권을 투쟁 구호처럼 부르짖던 이들이 맞나 싶다.

    2024-03-18 20:06:49

  • [세풍] 박정희 동상 단상

    [세풍] 박정희 동상 단상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동상'이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이미지는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일 것이다. 6.5m 높이로 세계적 규모의 동상과 견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기는 위대함과 존경심의 척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국난 극복을 상징하는 인물로 국민 대다수가 공감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특정 공간에 그 공간을 대표하는 인물의 동상이 서는 건 자연스럽다. 경북 상주의 효자 정재수 기념관에 정재수 어린이상(像)이 마땅하듯 강원 평창 이승복 기념관에 선 반공 소년 이승복 동상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대구삼성창조캠퍼스의 호암 이병철 동상은 말할 것도 없다. 지탄의 목소리가 나오기는커녕 그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해 말부터 대구에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분출하고 있다. 산업화 영웅인 그의 동상을 건립해 그 정신을 후대에 물려주자는 바람이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이달 초 소셜미디어로 건립 의지를 드러냈다. 그에게 영감을 준 곳 중에 광주가 있었다. 그는 "달빛철도 축하 행사차 광주에 가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대구에는 박 전 대통령의 업적 흔적이 보이지 않아 참 유감스러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흔적은 전남 지역에도 적잖이 보인다. 특히 '새천년'이라는 표현이 많다. 목포 '새천년 시민의 종'의 현판, '市民鐘閣'(시민종각)을 김 전 대통령이 썼다. 고향 하의도 하의초교에도 그가 쓴 '새천년의 꿈' 기념비가 있다. 암태도와 압해도를 잇는 연륙교도 '새천년대교'였다. 지금은 '천사대교'로 이름을 바꿨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에 '새천년민주당'도 있었다. 대구에서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을 품고 있는 곳 중 하나는 영남대다. 총장실 접빈 공간 정중앙에 박 전 대통령 초상화가 걸려 있다.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을 학문으로 승화해 개발도상국에 전파하는 역할도 이어가는 중이다. 반대로 모교인 대구사범학교의 후신, 경북대에서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게 옛 사범대 로비에 있던 흉상 부조상이었다. 2022년 지상 8층짜리 새로운 사범대학 건물이 들어서는 사이 자취를 감췄다. 1971년부터 반백 년 동안 있으면서도 부조상의 운명은 평탄치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철거 요구는 반복됐다. 반민주 독재의 표상으로 인식된 탓이었다. 철거 요구 대자보도 꾸준히 붙었다. 결국 옛 사범대 건물 해체와 함께 부조상은 갈 곳을 잃고 현재 경북대 박물관 제2수장고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창고인 곳에 있다. 가로세로 1.5m 크기로 웬만한 장정이 힘을 줘도 움직이지 않는 둔중함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의 부조상이 사라진 그해 경북대 사회과학대 공원에는 흉상 하나가 섰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고 1981년 옥중 사망한 정치외교학과 54학번 이재문 동문의 흉상이다. 그를 기억하려는 민주동문회 등 인사들이 나서 사회과학대 앞 공원에 세운 것이다. 이 공원의 이름도 '여정남 공원'이다. 역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때 사형당한 인물이다. 홍준표 시장이 11일 동대구역과 대구도서관 공원(대명동 미군기지 반환 부지에 건립 중)에 박정희 동상을 건립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역사적 평가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단군 이래 오천 년 역사에서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현실에서 지운 박정희를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2024-03-11 20:10:43

  • [야고부] 슬기로운 약자 생활

    [야고부] 슬기로운 약자 생활

    현대 의학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처방 중 하나는 사혈(瀉血)이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효용이 있는 것으로 통했다.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의 1836년작 '코'에는 주인공 이발사가 하는 일이 소개된다. 특기할 만한 건 정맥에 상처를 내 피를 뽑는 것도 수익원이었다는 점이다. 사혈로 뇌졸중도 예방한다고 광고해도 무리가 없던 시대였다. 전염병의 원인이 나쁜 공기 때문이라는 장기설(瘴氣說·miasma theory)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때는 중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1847년 빈 종합병원 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즈 제멜바이스가 산욕열로 죽어가던 임신부들의 시신을 부검하고 그들의 병세를 지켜본 결과 알게 된 게 손 씻기의 중요성이었다. 의술 발전사는 증세 호전이 초점이지만 통증 경감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이 주신 성스러운 감각인 통증을 인간이 없애려고 하는 건 불경이었다. 한 성직자가 클로로폼이라는 마취제를 사용한 의사에게 '여성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미명 하에 만들어진 악마의 도구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 사회를 냉담하게 만들 것이며 괴로운 순간에 신을 향해 외치는 가장 깊은 절규를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건 1850년대였다. 서양 의학계는 1846년 존 워런이 에테르를 사용해 목 혹 제거 수술을 한 걸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로 본다. 다만 일본은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가 1804년 통선산(通仙散)으로 60세 유방암 말기 환자를 수술한 게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다. 마취술의 발전 덕분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1853년 레오폴드 왕자 출산 때 산통에 떨지 않아도 됐다. 3년 전 아서 왕자를 낳을 때 왕실 고문 의사들이 강경하게 마취를 반대한 것과 다른 분위기였다. 클로로폼을 묻힌 손수건이 여왕의 얼굴에 덮였고 마취 효과는 53분 동안 지속됐다. 정부와 의사들의 대치가 장기화되며 '지금은 아프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천하장사도 환자가 되면 의사 앞에선 철저한 '을'이다.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약자이기 마련이다. 요즘 들어 부고 소식이 잦은 건 순전히 기분 탓이겠지만 큰 병을 조기에 발견해도 대책이 마땅치 않은 게 기본값이 됐다. 시술의 통증을 참는 게 당연했던 때처럼 인내가 당연하다는 2024년이다.

    2024-03-10 21:45:53

  • [야고부] 야학

    [야고부] 야학

    나이가 들어 뭔가를 할 때 '노익장(老益壯)'이라는 진부한 수식어를 붙인다. 후한의 명장 마원이 주인공인 고사다. 반란군 토벌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왕에게 간청했던 그의 나이는 예순둘이었다. 왕이 주저하자 마원은 "궁할수록 굳세어지고 늙을수록 더 건장해야 한다(窮當益堅 老當益壯)"고 말하며 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최근 방영된 대하드라마로 다시 주목을 받은 강감찬 장군도 일흔하나의 나이로 귀주대첩에 나선다. 8년간 전쟁에 대비해 온 터였다. 준비된 자를 하늘도 돕는다는 역사의 증언이다. 뜻을 세워 이루는 데 나이는 걸림돌이 못 된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교훈도 담겼다. "난 이미 늦었어"를 영화 속 클리셰 정도로 치부하는 곳 중에 '야학(야간학교)'이 있다. 20세기 유물인 줄 알았던 야학이 아직도 있냐며 놀라는 이들도 있지만 개교 70년을 넘긴 대구 삼일학교를 비롯해 대구경북에는 두 손으로 세야 할 만큼의 야학이 남아 있다. 야학을 찾는 이들은 대개 배움의 때를 놓친 60~70세 어르신이다. 이들에게 배움은 집념에 가깝다. 드라마가 제아무리 재미있어도 밤 시간대를 책과 씨름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러 오는 이들도 있다. 피곤을 못 이기면서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제때 배우지 못한 게 한(恨)이었다. 때가 되면 공부를 다시 하겠다며 마음속으로 몇백 번을 다짐했다 보니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소 힘줄보다 질긴 의지로 배우려 드니 배우는 모든 것이 새롭다. 예순이 훌쩍 넘어 한글을 깨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등단 시인 뺨치는 감성으로 지난 삶을 써낸다. 행간에서 드러나는 삶의 역정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세네갈에서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예의 바르게 표현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한다는데 비유컨대 이들의 삶을 '의지의 도서관'이라 불러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예천군 공무원들이 '퇴근길에 공부하자'라는 '예천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일과 시간 후에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니 직장인들에게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승진이나 학위를 보장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열공 모드'라고 한다. 새로운 의지와 열정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탠다.

    2024-02-29 20:19:06

  • [야고부] 멸칭

    [야고부] 멸칭

    중국인들은 명나라 만력제(신종)를 암군으로 평가한다.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우면서 정작 명나라를 위태롭게 한 탓이다. 그의 38년 치세를 치욕으로 여긴 홍위병들은 그가 죽고 300년 뒤 능을 파헤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에게 내린 중국인들의 멸칭은 '조선황제' '고려천자'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백잔(百殘)'은 백제의 잔당, 요즘 말로 하면 '찌끄레기 백제 것들' 정도가 된다. 낮잡아 쓰는 표현이 공문서에 해당하는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멸칭은 발화와 동시에 미묘하나마 경멸의 색채를 표정에 묻히기 마련이다. 중국인 앞에서 '짱깨', 일본인 앞에서 '쪽바리'라 할 때는 된통 맞아도 괜찮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멸칭도 있다. 프랑스어 'chaussette(쇼셰트)'는 아메리카노를 가리킨다. '양말 빤 물'로 풀이한다. 음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미국을 깔보는 심리와 결합한 것으로 풀이한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특정 직군을 싸잡아 폄하하는 것도 비슷하다. 소위 '사' 자가 붙는 검사, 판사, 의사에 접미사 '-새'를 대신 붙여 낮잡는 조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의사'라는 발음이 '의새'로 들리면서 논란이 일었다.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동안 의새들이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한 일은 없다"였다. '의대 정원'에 이어 '의사'라는 표현이 뒤이어 나오자 모음조화를 지키려던 말실수라는 옹호도 있다. 반면 아나운서 뺨치게 전달력이 좋은데 실수라 보기 어렵다는 반박도 있다. 피곤해서 나온 말실수라고 정부는 일축했지만 정·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 때 나온 실언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모든 공세적 에너지 소모는 환자들 앞에서 무의미하다. 바이럴 마케팅의 최고 효과는 식도락 분야가 아닌, 의술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죽어가는 사람 살렸다는 입소문은 어떤 말보다 빠르다. '명의'라는 예칭은 언론이 만드는 게 아니다. 사람 잘 안 변한다지만 죽다 살아난 사람은 변한다. 그들은 거칠 게 없어, 살리는 능력을 발휘한 이를 '참의사' '의느님'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형 병원의 업무 차질이 길어지려 한다. 치료를 받아본 경험자의 세설이 갈 곳을 잃었다. 환자들이 의사들을 기다리고 있다.

    2024-02-21 19:49:52

  • [세풍]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

    [세풍]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

    악의 기운이 세상을 덮치고 있어도 기어이 정의가 승리하는 때가 온다는 뜻으로 통석하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핍박에도 의연히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이들이 즐겨 쓰는 관용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빌려 쓰면서 정치적 환난을 대신하는 표현으로 회자했다. 이솝 우화에 실린 말이다. 우화에서 게으른 일꾼은 '수탉 때문에 새벽이 온다'고 오판한다. 그러고는 수탉을 죽인다. 남 탓을 하더라도 번지수는 제대로 찾아야 하는데 엉뚱한 희생양을 삼은 것이다. 아시안컵 4강 요르단전에서 졸전을 보이다 패배한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 클린스만과 수석 코치였던 헤어초크의 외신 인터뷰가 국민감정을 다시 자극하던 차다. 자신들이 잘 다져 놓은 기술력과 경기력을 몇몇 선수들이 개인감정으로 망쳤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핑퐁 게이트' 때문이라는 주장인데 그들의 원격 근무 등 불성실을 1년 가까이 지켜본 터다. 이들에게 논리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냉정히 말해 이번 아시안컵에서 꼭 우승해야 했던 건 아니다. 대한민국 축구 팬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고 한 것도 아니다. 아시안컵과 비슷한 기간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천신만고 끝에 우승한 코트디부아르도 월드스타 디디에 드로그바가 있을 때 우승한 적이 없다. 우리 축구 팬들이 격분한 지점은 '경험한 적 없는 불성실'에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보고 꿈을 키워온 주축 선수들이 성장을 거듭했음에도 그에 비례한 열매가 불성실 탓에 온데간데없어졌다 보는 것이다. 좋은 스승과 감독은 이미 완성된 재원을 고르는 게 아니라 완성될 재원을 알아채고 재능을 끌어낸다. 우리 팬들이 클린스만 감독에게 바란 것은 어떤 조합으로 최적의 결과를 낼지 궁리하는 것이었다. 하여 '성실한' 클린스만이 국내 경기도 충분히 보고 선수들을 관찰했더라면 선수들의 행동 양태나 분위기를 십분 파악했을 것이다. 더구나 경기 결과가 좋지 않아도 선수가 감독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반대로 선수 탓을 하는 감독도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시안컵 4강전 직전 선수들의 다툼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공식적인 조사 발표가 없으니 각색된 이야기도 부지기수다. 유튜버들의 먹잇감으로 방치돼 있다시피 하다. 이제는 개인 갑질 사례까지 끼어들어 퍼진다. 옳지 않다. 성인이라지만 평생 격려와 칭찬에 익숙한 선수들이다. 지금의 억측과 모욕은 맷집이 좋다는 정치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선수들도 알아야 제대로 반성한다. 클린스만을 감독으로 선임한 과정도 공개해야 한다. 검증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인재를 보는 눈높이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권위에 의한 독단적 감독 선임이었다면 구조적 병폐로 봄이 마땅하다. 권위는 힘을 과시하거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해 독점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누구도 찍소리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갖는 건 권위가 아닌 광신적 맹종이다. 권위를 신뢰하는 것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중용은 '화살이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과녁을 탓하지 말고 자기 몸의 자세를 바로잡으라'(失諸正鵠, 反求諸其身)고 했다. 클린스만 등 외국인 코치진이 알기 어렵겠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알 만하리라 짐작한다. 여론이 잠시 끓다 말 것이라 오산하면 얼렁뚱땅 넘기고 같은 처방만 반복할 공산이 크다. 대한축구협회가 자세를 바로잡아야 할 시간인 것으로 보인다.

    2024-02-19 20:07:38

  • [야고부] 게으른 스승

    [야고부] 게으른 스승

    MZ 세대 동료들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자신만의 선행이 안줏거리로 올랐다. 선행은 남 몰래 하기 마련이어서 교류가 제법 잦아도 알기 힘든 것들이었다. 10년 넘게 개발도상국 집 짓기 후원, 사후 장기 기증 약속, 어린이 암 병동에 상금 기부 등이 찬탄 속에 소개됐다. 좌중의 정신이 번쩍 드는 자백들이었다. 논어 술이 편은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일러준다. 배우려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좋은 걸 알아채고 긍정적으로 발현하려는 힘이다. 일회성이라 해도 유명인들의 선행은 '선한 영향력'으로 대중에 전달된다. 동참 의지를 북돋우는 것이기에 언론이 더 크게 다룬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설 연휴 직전 연탄 나눔 봉사활동에 나섰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정치 쇼를 한다고 저격했다. 그의 얼굴에 묻은 숯검정을 가리켜 '연탄 화장'이라 했다. "옷보다 얼굴에 먼저 연탄 검댕이 묻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했다. 봉사활동 한답시고 인증 사진만 찍고 가 버리는 악습이 우려됐을 법하다. 설 연휴 밥상 민심에 '정치 쇼 하다 망한 한동훈'이 회자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연탄 나눔이 담긴 영상에는 봉사활동 관계자들이 장난치듯 검댕을 묻히는 장면이 나왔다. 무엇보다 설 연휴 민심의 눈은 정치 영역에 있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클린스만 감독이 있었다. 아시안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4강까지 갔지만 그를 향한 원성은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혹평이 범람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원격 업무 등이 일상이던 그를 '게으른 스승'으로 판정해 버린 것이다. 아시안컵 직후 적어도 며칠은 우리나라에 머물며 대회 평가 등을 할 거란 예상도 깨 버렸다. 이틀 만에 자신의 집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 얼마나 우리를 가볍게 보면 이러나 싶은 모멸감마저 더해져 여론은 악화일로다. 위약금을 물지 않고 내보내는 방법 등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유한다. 여론 읽기 귀재라는 정치인들도 그의 거취를 논한다. 우민(愚民)이 득시글한 곳에서는 현자도 말솜씨 좋은 약장수 취급을 받는다지만, 이쯤 되면 그를 임명한 대한축구협회의 해명과 결단이 뒤따라야 마땅한 시점으로 보인다.

    2024-02-12 18:22:43

  • [야고부] 차붐의 동병상련

    [야고부] 차붐의 동병상련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의 각본 없는 드라마에 축구 팬들이 열광하는 것만큼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도 언더도그의 반란이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눈길을 잡아챘다. 아시안컵에서 요르단의 4강행이 진기해 보이듯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도 카보베르데, 적도기니 등이 선전했던 것이다. 특히 대서양의 군도를 영토로 삼는 '카보베르데'(Cape Verde)는 남아공에 승부차기로 석패해 4강 문턱에 올라서지 못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포털사이트와 지도에서 검색하니 60만 명 남짓의 인구에, 우리나라 시 단위에 그치는 면적이다. 스포츠 경기의 호성적이 국위 선양이라는 주장이 유효한 듯하다. 유럽에 대한민국을 널리 알린 이는 단연 '갈색 폭격기' 차범근 씨다. 대한민국을 알린 공신록에 올린다면 일등 공훈에 해당할 만큼 특출한 활약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 1970년대 후반 혜성같이 등장해 1980년대 후반까지 맹활약한 그가 있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다크호스로 분류되기도 했다. 축구 변방인 동아시아에서 그의 존재감 덕분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그가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가족들이 비슷한 고통을 겪은 바 있어 그 마음을 잘 안다는 동병상련의 감정적 연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0대 5로 대패한 뒤 감독직에서 쫓겨나고 온 가족이 비난의 올가미에 얽혔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조국 전 장관과 알고 지낸 사이라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그걸 '인간적 의리'라 부른다. 이것마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주저해야 한다면 삭막한 사회적 분위기를 탓해야 한다. 정치색의 잣대로 재단하려 드는, 고약한 마음 씀씀이에서 터져 나오는 비난의 아우성을 견뎌 낼 재간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럼에도 그의 선한 의지를 희석시킨 사진 한 장은 못내 아쉽다. 방송인 김어준, 주진우 씨 등과 집에서 고기 파티를 하고 찍은 사진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표지를 장식했던 미국 타임지가 있었다. 조 전 장관과 지인 관계는 아니지만 '이념 동맹'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해명에서 서글픔이 밀려든 까닭이다.

    2024-02-05 18:52:36

  • [야고부] 관례와 의전

    [야고부] 관례와 의전

    왕이 상징적 존재이던 중세 일본 왕실에서는 명절 선물 준비가 큰 부담이었다. 귀족들과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약소한 것을 선물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받은 것 중 귀한 걸 열어 보지 않고 다시 선물로 보내는 수를 썼다. 그런데 당시 귀한 선물로 인식되던 것 중에 도미가 있었다. 보관이 까다로운 생물이 몇 차례 손을 거치면 성할 리 없었다. 상한 냄새가 나 열어본 이가 마지막 수취인이 되는데 폭탄 돌리기가 된 명절 선물 관례다. 대구시가 근무 4대 혁신 방안을 내놨다. '인사 철 떡 돌리기' '계획 없는 회식' 등을 자제하자는 거다. 불합리한 관행을 없애고 MZ세대 공무원의 퇴직을 막자는 취지다. 인사 철 떡 돌리기는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미풍양속처럼 보였지만 근무시간에 주로 돌리다 보니 업무 공백이 생겼다고 한다. 방문 일정까지 조율해야 했다니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인사치레를 하지 않으면 흠이 된다. 진퇴양난의 관례로 비쳤을 것이다. 본업 외에 신경 쓸 게 많으면 혼돈의 카오스가 열린다. 예컨대 점심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신입 직원들의 머릿속은 하얘진다. 메뉴 결정부터 난관이다. 상사가 전날 술을 마셨는지, 심기가 어떤지 살펴야 한다. 식당에서도 수저 놓고, 물 따르고, 반찬 리필에 신경 쓰면 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이러려고 몇 년씩 젊음을 바쳐 시험을 치렀나 싶은 자괴감이 들 만하다. 의전에 밝을수록 상사의 마음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담보하는 긍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진짜 타파할 건 예의라고 합의된 관례, '의전'일지 모른다고 추측하는 까닭이다. 의전은 MZ세대의 눈에 자신들이 합의한 적 없는 윗세대의 문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그 법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속내다. 어떤 직장이든 비슷한 관례가 있다면 기왕지사 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혁신은 단순화에서 온다. 신경 쓸 것들이 하나씩 없어져야 일의 능률이 오른다. 특수부대일수록 엉뚱한 기강 잡기가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 스스로 알려 하지 않으면 훈련에서 실수를 한다. 실전이라면 죽음을 의미한다. 본업에 충실하도록 하는 게 가장 확실한 혁신 방안이다.

    2024-01-28 21:55:07

  • [야고부] 계급장의 무게

    [야고부] 계급장의 무게

    나 때는 그랬다. 계류장처럼 머물렀던 곳은 훈련소가 아니었다. '보충대'라는 곳이었다. 훈련소로 가기 전 3박 4일 정도였다. 할 수 있는 측정이란 건 다 했다. 체격이나 간단한 체력 측정도 했지만, 인성 측정까지 했다. '장정'이라 불리긴 했지만 불량 보급품을 골라내는 듯한 오싹한 기분도 들었다. 군 생활 부적응 가능성이 있는지 거르는 감별 과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6주의 신병 훈련은 사단 훈련소라는 곳에서 받았다. 설악산 기슭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되는 사단가를 외워야 했다. 6주 동안 열심히 불렀을 뿐인데 30년이 다 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반복의 힘이다. 악전고투의 시기를 끝내고 나면 이윽고 가로로 누운 한 일 자 막대(가로 5㎝, 세로 1㎝ 정도) 하나를 군모와 가슴팍에 부착하게 된다. 이등병 계급장의 표식, 그렇게 무거울 수 없다는 세칭 '작대기 하나'다. BTS 멤버 RM(본명 김남준·30)과 뷔(본명 김태형·29)가 최근 육군훈련소 수료식을 가졌다고 한다. 최정예 훈련병으로 선발됐다니 서른 즈음에 느지막이 간 군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전해진다. 평생 군 복무 문제로 괴롭힘당할 일 없을 '까임 방지권'까지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군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소감도 나왔다. 이등병 김남준은 "정신전력교육을 통해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인 우리 대한민국에서 군의 필요성, 기초군사훈련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어젯밤도 편안히 잠에 빠질 수 있었고, 오늘 낮에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걸 '일상'이라 부를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우리의 형제자매와 아들딸, 친구들이 묵묵히 지켜 주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북한이 연초부터 강도 높은 겁박을 이어 가고 있다. 핵 위협은 기본값이 됐다.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북핵 개발은 자위권 차원에서 일리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피력했다'고 했던 사람들의 근거가 희박한 낙관적 언변의 값을 치르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일상을 영위한다. 여유는 우리 군이 충분히 강하다고 믿는 데서 온다. 이등병 계급장이 든든해 보이는 요즘이다. 덕분이다.

    2024-01-17 20:03:25

  • [세풍] 그 공천, 소통된 건가요?

    [세풍] 그 공천, 소통된 건가요?

    "쟈는 또 누 집 아로?" 총선 예비후보 등록 이후 명함을 돌리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한 예비후보자가 인사하고 돌아서자 읍내 촌로들이 자기들끼리 묻고 답한다. 당적 표시는 죄다 빨간색 바탕이니 관심사가 아니다.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다며 부모가 누군지 묻는 것이다. 그렇게 예비후보자 집안의 내력을 줄줄 주고받으며 근본을 따진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답게 그 집안이 친일을 했는지, 독립운동을 했는지, 윗대에서 면서기를 했는지, 몇 마지기 논밭을 일궜는지 오래지 않아 정리한다. 뼈대 있는 집안이라면 조선시대 벼슬까지 뻗어간다. 총선에 나서려면 온 집안이 샅샅이 파헤쳐질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지역에서도 쉽게 알 만한 사람이 출마하면 이런 일은 덜 일어날 것이다. 선거 때만 지역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며, 소통하겠다며 나서니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선향(先鄕)이라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한둘이 아니다. 유권자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탓할 일도 아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한 것도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이래서 정치인은 본인 부고를 제외하고 자주 언론에 나와야 좋다고 했던가. 소통을 뜻하는 영어 표현 'communicate'의 접두어 'comm'에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같이 뭔가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소통이라는 것이다.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뜻밖의 혐오 논리가 탄생하기 마련이다. 얼굴이라도 봐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회식일지라도 부장들의 회식 개최를 혐오의 눈으로 볼 것만도 아닌 까닭이다. 집에 가기 싫어서가 아니란 말이다. 세상 유치해 보이는 대환장 회식 건배사일지언정 밑바탕에는 소통이 있다. 실제로 효과가 있다. 같이 먹고, 같은 노래를 떼로 부르면 생기는 일체감이라는 게 있다. 교가는 내부 단합을 끌어내는 마법 같은 노래다. 립싱크로 불렀거나 말거나, 재학 시절 조회 때마다 이걸 왜 부르나 의구심이 들었다면 동문회에 가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엔간한 학교 동문회의 마지막 순서는 교가 합창이다. 동시대에 같은 경험을 했다는 감정적 일체감은 소통의 문턱을 한층 낮춘다. 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부산을 찾으며 입은 옷이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가슴팍에 '1992'라 적힌 것이었는데 1992년은 롯데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다. 확실한 메시지, 저는 부산 시민 여러분과 중요한 순간을 함께합니다, 가 담긴 것이다. 그도 설명했다. 92학번이고 롯데의 1992년 우승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애도하는 방식도 공감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노란 리본 모양의 머리끈을 한 정치인이 경기 안산에 간다거나, '2003'이라 적힌 상의를 입은 정치인이 2월의 대구를 찾는다면 시민들이 의미를 단박에 알아챌 것은 자명하다. 4월 총선 공천이 본격화하고 있다. 여야 모두 심혈을 기울인다 하겠지만 '윤심'이니 '명심'이니 '자객 공천'이니 하는 지역 민심과 유리된, 허황한 단어들이 또다시 부유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다르길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다. 과학적 격언이 정치에서도 일관되게 통하는 건 아니겠지만 민심의 교감과 거리가 먼 구호, 레퍼토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길 바란다. 지역과 오래 호흡해 온 이들이 지역민과 오랜 소통을 거쳐 출마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건 없다.

    2024-01-15 20:06:34

  • [야고부] 환상 속의 그대

    [야고부] 환상 속의 그대

    지금이야 손쉽게 구하지만 1991년 농산물 수입 자유화 이전까지 고급 과일로 통했던 바나나는 1970~80년대 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환상 속의 과일'이었다. 1977년 바나나 16개 한 송이 가격은 5천500원. 자장면 한 그릇이 200원 정도였으니 서민 가정에서 맛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상만 하는 맛은 구전되기 마련이다. 백문(百聞)의 바나나 맛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맛의 일반화, 계량화도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체리, 바나나, 멜론 등 수입 과일은 비슷한 향을 낸 사탕으로 대리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다 보면 석류 과자에 환상을 품게 된다. 접대 음식으로 반복해 등장하니 소설판 PPL(간접 광고)이라 볼 수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는 석류를 재료로 한 과자가 없으니 상상만 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당들을 설레게 한 술 중에 '압생트'라는 게 있다. 역시나 환상이 만들어낸 아우라로 배가된 향미와 취기라 볼 수 있다. 30년산 위스키든, 어떤 술이든 과음하면 제정신이 아닌 건 동일하다. 압생트에 만취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타고 윤색돼 생겨난 환상이다. 맥주 애호가임을 강조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테네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달리다 35㎞ 지점 땡볕 아래에서 맥주 한 모금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42.195㎞를 완주한 뒤 마침내 시원한 맥주를 마셨는데 상상하던 맛이 아니었다고 한다.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건만 외부적 요인에 의해 깨지기도 한다. 장기 회원 계약으로 돈만 챙기고 폐업해 버리는 '먹튀' 영업장이 대표적이다. 다이어트 성공, 몸짱 되기 등의 최면성 환상은 '먹튀'로 물거품이 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지만 단단한 생활인마저 의지가 꺾이게 된다. 그러나 쉽게 인생을 얘기하지 않고, 환상을 현실로 만들려던 모든 노력의 시간은 결코 멈추어질 순 없다. 바로 지금이 먹튀 방지 법제화에 나서야 할 순간이다. 무엇을 망설이나.

    2024-01-10 20:05:49

  • [야고부] 등단 작가

    [야고부] 등단 작가

    "저기, 그런데요… 제가 몇 년 전에 등단을 했는데요. 이름 없는 곳이거든요. 상금도 없는 곳에서 등단했는데 응모해도 되는가요?" 신춘문예 공모 시즌이면 주최 측인 신문사로 문의 전화가 빗발친다. 원고 마감을 일주일쯤 남기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 된다. "어디까지를 등단으로 인정하느냐"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신인 발굴이 취지이다 보니 유력 공모전 수상 이력이 있는 이들의 응모를 막아둔 탓이다. '확인'과 '재차 확인'에 한숨이 섞인다. 자칭 '신춘 낭인'이라는 문학청년들의 패기는 나이를 불문한다. 연초는 '신춘문예 당선작의 시간'이다. 당선작 품평과 관련 사연이 문단에 오르내린다. 여러 신문사에 다른 작품을 보내 동시에 당선작을 내는 이도 있다. 당선자들은 호쾌하게 상금을 쓴다. 써야 또 들어온다는 '기원형 소비'다. 호쾌하게 당선 턱을 내다 상금액을 넘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주목은 오래가지 않는다. 등단 작가 대우를 받으며 진검승부 판에 들어가는 것이다. 원고 청탁에 신경 쓰기 시작한다. 원고 청탁 부재를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도약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김금희 작가는 2009년 등단 이후 2년 동안 청탁이 없었다고 한다. 등단 작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카페에서 매일같이 글을 썼다고 한다. 이른 시간에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 나온 까닭이다. 1995년 등단한 은희경 작가도 마찬가지. 청탁이 거의 없어 절박한 마음으로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최근 100쇄를 돌파한 '새의 선물'이다. 작가로 눈도장을 찍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웹소설로 상업성을 평가받고 신춘문예에 도전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140자 소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X(옛 트위터)'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140자다. '30초 만에 울 수 있다. 25만 부 돌파'라는 광고 문구가 이채롭다. 국내에서도 2015년 즈음 선을 보인 바 있다. 어딘가에는 고수들이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도 이순을 넘겨 등단한 이들이 여럿 보인다. 스스로를 '신춘 낭인'이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전력을 다했을 것임은 짐작하고 남는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이들도 낙담하지 않길 바란다. 등용문은 여러 군데 열려 있다.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의 목소리를 보탠다.

    2024-01-02 20:26:52

  • [야고부] 당시에는 관례

    [야고부] 당시에는 관례

    당시에는 관례로 통하던 게 있었다. 1960~70년대 정치인들은 카메라가 앞에 있거나 말거나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웠다. 회의장이나 정치 집회에서도 그랬다. YS, DJ가 피우는 모습도 화면에 잡혔다. 실내 흡연이 권위를 보여주는 매우 관례적인 방식으로 여겨졌다. 뿌연 연기 사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기록 영상으로 남아 있다. 관례처럼 나돈 항설 중에는 배가 나온 것이 '덕'(德)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치인들의 불뚝한 배를 넉넉한 인품으로 칭송한 것이다. 대머리가 강한 스태미나의 증거라는 낭설도 마찬가지다. 당시 대머리 대통령을 미화할 작정으로 관변단체가 총동원됐을 거라는 설익은 음모론도 있었다. 지금 보면 질병에 가깝게 취급되는 흡연, 비만, 탈모가 권위로 둔갑했던 시절이었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통하던 무지(無知)였다. 소설가 김훈은 '아들아,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글에서 평발로 군면제 가능성을 두드려 보던 아들에게 기꺼이 국방의 의무를 질 것을 당부한다. 관례적으로 평발이 군면제 사유라 납득되던 때가 있었다. 장거리 행군 등에 부적합하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는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 세대가 늙으면 아들 세대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이고, 몇몇 비굴한 이탈자들로 신성이 모독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니,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고 썼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을 응원하는 이들이 탄원서에 "체험활동 증명서 부분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례였다"고 적었다. 불법임이 분명한데 입시 조작이 관례이던 때가 있었다니, 1970~80년대 이야기인가 싶었더니 2010년대다. 4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는 탄원서에 반성은 읽히지 않는다. 1980년대는 340점 만점의 학력고사 성적으로 입학 문턱의 높낮이가 책정됐다. 부모의 재력, 학벌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 비교적 공정하던 때다. 홀어머니 밑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이들이 소개될 때면 너나없이 눈시울을 붉히던 시절을 이미 살아온 바 있다. 뒤늦게 대입 절차가 관례적으로 부모의 개입과 불법을 용인해왔는지 안다. 이런저런 증명서 하나 재깍 만들지 못한 부모의 자괴감을 다시 공감한다.

    2023-12-27 20:00:19

  • [세풍] 시대정신, 기부(寄附)

    [세풍] 시대정신, 기부(寄附)

    "철 좀 들었네"라는 말을 들은 때는 대개 비슷했다. 열대여섯 살 안팎에 훌쩍 커 버린 키와 몸무게에 대한 기대치처럼 따라붙었다. 집안 사정에 따라 일찌감치 철이 든 이들도 있었다. 양친의 부재라는 애석한 현실과 빠듯한 살림은 철들기 빠른 조건이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않고 가족이나 공동체를 돌아보며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경제관념이 생겼다는 걸로 치환해도 무리가 없었다. 가령 줄줄이 달린 동생들의 미래를 생각해 일찌감치 취업하는 건 '장한 자식상(像)'으로 권고됐다. 일찍 철든 이들이 가정에는 효자였고, 국가에는 역군이던 때가 있었다. 1960~70년대 외화도 벌고, 공부할 기회도 갖겠다며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광부와 간호사들로 대표되던 때였다. 1970~80년대도 마찬가지.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쿠웨이트 등 열사의 땅에서 사력을 다해 팥죽땀을 흘린 건설 역군들이 있었다. 6·25전쟁 안팎에 출생한 이들의 시대정신은 단 하나. 혈육과 후손이 배곯지 않을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철이 든다'를 '사리를 분별하는 힘을 갖게 된다'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사랑니를 잘라낸다'(cut one's wisdom teeth)는 영어식 표현 또는 '물심이 자리 잡다'(物心がつく)는 일본어식 표현도 '눈치가 빤해지는 시기가 됐다'는 뜻으로 풀이해도 이상하지 않다. 시골 어르신들은 '시근이 들었다'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양상을 읽어낸다는 것인데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변곡점임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세상과 호흡하며 나누려는 마음은 '기부'(寄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은 재능 기부와 현물 기부 등 각종 기부를 보도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내남없이 저마다의 가진 것들로 할 수 있는 걸 독려하는 데 진심이다. 조선이 시대정신으로 선양한 충효(忠孝)를 위해 방방곡곡에 열녀비와 효자비를 세운 배경과 닮았다. 열녀와 효자의 행적을 본받아 만백성이 따르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단연코 '기부'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다.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겸양을 강조한 말로 해석한다. 내세우지 말고 선한 일에 힘쓰라는 것이다. 선행을 뭇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신이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의로운 공적을 스펙처럼 쌓지 말고, 소셜미디어에 자랑하듯 남기진 않았으면 하는 경계다. 그럼에도 기부 행렬은 여러 차례 소개돼야 마땅하다. 기부는 성장하는 기업의 매출액과 닮았기 때문이다. 기부 행위의 폭을 넓히고, 기부 금액도 늘리려 하는 성질이 있다. 심지어 기부 금액이나 기부 활동이 적어지면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희한한 사죄다. 더군다나 선한 영향력으로 퍼져나가는 성질마저 있다. 대기업이 내놓은 뭉칫돈의 귀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대중은 적은 금액이라도 힘들게 모은 기부금에 환호하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이들이 기꺼이 나선 재능 기부를 추앙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들이 누르는 감동 버튼은 힘이 강하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결기를 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연중 내내 곳곳에서 마음먹는 기부의 노력들을 응원한다. '일인일기부'(一人一寄附) 문화가 확산해 선행과 기부를 소개하는 데 지면이 모자랄 정도여도 괜찮다. 기부는 덕업상권으로 퍼져 나가야 할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2023-12-25 19: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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