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독도를 지켜낸 '안용복 바로 알기' 전문가 좌담회
②독도 수호일지-일본으로 끌려간 안용복
③독도 수호일지-일본과 한국의 소리 없는 싸움
④독도 수호일지-또 다시 일본으로…독도를 취하다
⑤한국 속의 영웅·일본 속의 허풍쟁이

안용복 등을 태운 배는 약 보름여를 거쳐 일본 오키국(동해에 있는 시마네현 소속의 군도)에 정박했다.
때는 1693년 4월 20일쯤이었다.
오키국 번소(일본의 관청)에서 일본 어부들은 "우리는 오오야 선단의 전복 채취 어선이다. 우리 땅(울릉도)에 이놈들이 들어왔길래 잡아 왔다"고 고발했다.
안용복은 그 소리에 대뜸 큰 소리를 쳤다
"우리는 조선의 관원으로 울릉도를 단속 중이었다. 오히려 이 놈들이 남의 땅에 침범해 놓기로 애먼 소리를 하느냐"
안용복의 호탕에 오히려 놀란 것은 함께 납치됐던 박어둔이다.
"아니, 용복 아재! 그런 큰 거짓말을 하면 어이 하오."
"이놈들이 우리가 어부라 하면 눈이나 깜짝하겠소. 노꾼이었데도 얼마 전까지 관졸이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오. 마침 우리에게 문서도 여러 개 있으니 이걸로 밀어붙여 봅시다"
앞서 울릉도 조업을 위해 가져왔던 대마번주와의 협약서 등 3통을 번소 관리들에게 내놓으며 안용복은 허리를 양껏 재쳤다.
덩치가 우람한 안용복이었다. 노꾼 생활을 하며 단련된 팔뚝은 잘 훈련된 군병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서명에 안용복은 자신을 '안 병사 42세'라 적고, 박어둔은 토라헤(동래현의 일본식 발음) 34세'라 적었다. 병마절도사란 거창한 신분을 대고 싶었으나 일본 관원이 도무지 알아 듣지를 못했다.
박어둔 역시 자신이 동래현 출신이라고 한 말을 그냥 이름으로 알아듣기에 더 이상 말하기를 관뒀다.
문서와 조사서를 받은 오키국 번소 관원들은 술 한통을 이들에게 내리고 곧장 상급지역인 돗토리번(시마네현에 접한 일본 서부의 도시)에 보고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조선의 관원이라고 한다면 이 건은 조그만 섬의 번소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
일주일 후 돗토리번 요나고지방에 도착했지만, 안용복 등은 한동안 아무도 찾는 이 없이 한달여를 보냈다. 일본은 이들을 선주 오오야의 가택에 가두고 삼엄히 경비를 섰다.
그 순간 안용복에 관한 정보는 특급으로 에도(현 도쿄)에 있던 이케다 츠나키요 돗토리번 번주에게 전달됐다.
1693년 5월 10일 돗토리번주는 막부에 해당 문서를 상소했고, 막부 노중(쇼군 휘하에서 국사 전반을 통솔하는 직책)인 츠치야 마사나오와 밀담을 나눴다.
"이 조선인들이 울릉도에서 왔다고 했는데, 도대체 울릉도가 어디요?"
"예 노중. 울릉도는 우리가 말하는 죽도이지요. 몇 십 년 전부터 전복을 잡아 막부에 진상하던 곳입니다"
"그쪽이라면 죽도가 호오키 지방의 땅이요?"
"아닙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일본)가 계속 조업을 한 곳이고, 조선은 관심도 없었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될 것도 없겠구만. 조선과의 일이니 대마도번에 연락해서 이 일을 마무리 지으라 하시구랴. 그 조선인들은 나가사키항을 통해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당시 조선과의 무역이나 외교는 중간지역인 대마도가 일임하던 것이 원칙이었다.
노중의 서명으로 대마도번에 보낸 지시 문서에는 "죽도(울릉도)에 조선인이 남아있거든 그들 나라로 돌려보내고, 앞으로 조선인이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조선 조정에 이르라"는 내용이 담겼다.
노중의 문서와 함께 안용복 일행은 대마도번에 인계됐으며, 납치된지 반년이 넘은 그해 11월 2일 겨우 부산왜관으로 돌아 왔다.
울릉도가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사실상 일본 어부들이 점령했으니 앞으로 일본의 땅이라는 것이 막부의 뜻이었다.
이로써 울릉도를 사이에 둔 일본과 조선의 소리없는 외교 전쟁이 그해 겨울이 지나도록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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