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1일 정세균 국무총리는 독감백신을 맞기 위해 세종시의 한 보건소를 찾았다. 70대인 그는 백신의 안전성 논란으로 국민 불안이 증폭되자 먼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4일 뒤 정 총리는 "국민들은 전문가의 판단을 믿고 정부 결정에 따라 예방 접종에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는 백신으로 시작해 백신으로 끝났다. 이른바 '백신 정치학'의 예고편이었다.
◆코로나19 백신 확보 정치권 이슈로 떠올라
내년 4월 재보선 정국에서 코로나19 백신이 선거 무대의 상수(常數)로 급부상하는 모양새다. 내년 2~3월 첫 접종을 시작하고 하반기에 본격화하는 정부의 타임 스케줄로 보아 재보선을 넘어 2022년 3월 대선까지 여파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권은 백신 확보 시기와 규모 등이 표심에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며 대응 전략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21일 부산시장 출사표를 던진 이언주 전 의원이 "문재인 정권의 백신 확보 실패로 최악의 겨울을 나야 한다"고 날을 세운 것도 이 같은 기류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의사로서 백신 구매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부분에 분노했다"고 출마의 한 이유를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야는 백신 확보를 놓고 이미 한바탕 다툼을 벌인 상태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7일 "코로나19 백신이나 지원금 스케줄을 내년 재보선에 맞췄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제1야당 대표가 가짜뉴스와 아니면 말고 식 주장을 조합한 음모론에 기대어 정부를 흔든다"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다 4월 재보선용이냐고 묻고 싶다"고 반박했다. 선거전에 미칠 백신의 폭발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野 '백신 전쟁' 우위로 재보선 총력전
정치권은 김종인 위원장의 '도발'에 대해 지난 4월 총선 패배의 트라우마 또는 '학습 효과'가 일정 부분 담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1차 대유행하고 마스크 대란을 겪었음에도 민주당이 모두의 예상을 깨는 압승을 거둔 데는 '성공적인 방역'이 첫손으로 꼽혔다.
국가적인 위기 때 지도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뭉친다는 '공포의 지지효과'는 덤이었다. 백신의 정치학이 재보선에서 어떻게 변주돼 나타날지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따라서 정치권은 정부의 '백신 전쟁' 성과에 따라 표심이 출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내년 재보선은 K방역이 세계로부터 호평을 받던 시기에 치른 총선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것으로 야권은 전망한다. 정부의 로드맵대로라면 내년 4월은 백신 접종이 막 시작된 단계인 만큼 코로나19 확산세를 잡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백신 확보 논란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들이 접종 순위표를 타기 위해 조바심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론이 아무래도 야당에 쏠리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다. 현재 지지부진한 백신 확보 상황에 비춰볼 때 재보선 국면에서 백신 확보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다면 정부여당 책임론이 거세지고, 이에 따른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중진의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이 그렇게 자랑하던 K방역의 실체가 백신 전쟁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며 "하루하루 말이 바뀌는 데 정부의 백신 대책을 모른 체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與 "국민의힘 음모론" 주장 속 안전성 먼저
여권은 '음모론' 차단에 적극 나서면서 정치 쟁점화를 경계하는 모습이다. 정세균 총리가 21일 코로나19 중대본 회의에서 "허위조작 정보가 최근 빈번하다"며 엄정 대응을 방침을 밝힌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국민 70%가 안전성이 입증된 뒤 백신을 맞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국민의힘이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이를 정쟁화하겠다는 의도"라면서도 "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지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여권으로선 재보선을 즈음해 미국 등 많은 나라가 팬데믹(대유행)의 터널을 빠져나와 국경을 열고 경제를 본격 재개할 경우 백신 전쟁에서 밀린 한국은 바라만 봐야 할 처지가 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안 그래도 여론조사 결과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에 밀리는 점도 부담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백신의 안전성 검증을 바탕으로 집단 면역이 가능한 필수 보유량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로 맞선다.
백신은 적정량을 확보하더라도 안전성이 관건인 건 사실이다. 현재 백신 접종이 초기 단계여서 안전성 등 문제가 말끔히 해소됐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다. 일부 회사의 백신은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코로나19 백신이 상황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백신 정치 국면에서 치러질 내년 재보선에서 국민들은 누구 손을 들어줄까. 이승근 계명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국민의 목숨이 걸려 있고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예단하기 어려운 사안인데 정략적으로 나가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며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지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이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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