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13번째 이야기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
조탑리 권정생 선생 살던 집
마당에서 이리 저리 뛰어놀다가 풀숲 한 구석에 주저앉아 똥을 싸는 우리 집 강아지 '보리'의 모습은 동화 <강아지똥>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기시감이 든다. 강아지똥은 시골에서는 늘 발에 채이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그런 강아지똥이 거름이 되어 예쁜 민들레꽃을 피우다니... 그래 하느님은 쓸모없는 건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세상 모든 건 다 귀하고 쓸모가 있어."
어떻게 그 옛날 시골교회에서 종을 치던 '종지기'가 이런 생각을 동화로 쓸 수가 있었을까...그저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강아지똥은 이렇게 시작된다.
"돌이네 흰둥이가 똥을 눴어요.
골목길 담 밑 구석 쪽이에요.
흰둥이는 조그만 강아지니까
강아지똥이에요.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보더니
강아지똥 곁에 내려앉아 콕콕 쪼면서
"똥!똥! 에그, 더러워..."
하면서 날아가 버렸어요.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
<강아지똥>을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찾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에서 나와 안동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마을이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다. '조탑마을'이란 지명은 이 마을 한 가운데에 오층 전탑(보물 제 57호)이 있어서 생겼다. 보물로 지정된 이 전탑은 최근 문화재청에서 무너진 부위에 대한 복원공사를 하면서 지붕을 씌워놓아 볼 수가 없다. 전탑 바로 앞 골목길 입구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권정생 샘의 대형걸개그림을 '양철 벽'에 그려놓았다. 소탈한 정생 샘의 모습이 보이자 마음이 울컥해졌다.
골목길을 따라 100여m 쯤 가자 정생 샘을 닮아 나지막한 지붕의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 나타났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거기서도 산길을 걷고 냇물 돌다리를 건너고, 포플러 나무가 서 있는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 걸어 씩씩하게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 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중략) 선생님의 영전에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진달래꽃 한 다발 마음으로 바칩니다."
권정생 선생이 200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오덕 선생이 떠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2007년 권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따뜻한 봄이 오면 '강아지똥'을 거름삼아 오롯이 들판 곳곳에서 꽃을 피우는 민들레꽃 한 다발 꺾어 빌뱅이 언덕에 바치고 싶다.
권정생 선생은 먼저 가신 그 곳에서 잘 지내는지 묻고 싶다.
그야말로 단칸살이 오두막집이다. 댓돌 위에 올라서면 방 한 칸, 부엌 한 칸 있는 자그마한 토담집이다. 마당에는 선생이 기거할 때 사용하던 툇마루와 의자도 널부러지듯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마치 잠시 출타한 것처럼 보였다. 집 바로 옆에는 선생이 아침마다 세수를 하던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고 마당에서는 권 선생이 평생 종을 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직교회 종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집 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야 이 집이 권정생 선생이 살던 곳(1937~2007)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댓돌위에 올라서서 인기척 소리를 내면 권 선생이 문을 열고 "거기 누구신가?"하며 내다보실 것 같다. '내가 죽거든 이 집도 허물어라'라고 할 정도로 소유를 죄스러워한 그는 평생을 소박하고 소탈하고, 무엇보다 가난한 삶을 살았다. 오죽했으면 쌀밥을 먹게 되면, 평생 쌀밥 한 그릇 마음껏 드시지 못하고 고생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을까.
집 뒤로 난 언덕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권 선생이 늘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던 빌뱅이 언덕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엄마까투리> 등 수많은 동화와 소설 등 작품을 탄생시킨 산책길이다.
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고생하던 선생을 위해 동네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아래 지어준 자그마한 토담집이 이 집이다. 그는 이 집에 이사와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이사 온 집에 살아보니 좋은 게 많다. 아침에 일어나 개울에서 세수하는 것, 세수하고 나서 뒷산에 올라 가는 것이다. 요사이는 안개가 끼고 그리고 해가 뜨면 그 안개 사이로 나타나는 산국화 꽃이 너무 아름답다. 연보라의 쓸쓸한 빛깔이 후미진 골짜기 기슭으로 무럭무럭 피어 있는 모습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릅답다." (1983년 10월5일 이현주 목사에게 보낸 편지)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 (1983년 11월 4일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가난하지만 순수한 아동문학가에게는 처음 갖는 공간이었고 소중한 집필공간이었다.
'땡그렁 땡그렁 땡그렁 땡그렁..'
종지기는 새벽마다 종을 쳤다.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기도하러 나온 할머니, 할아머지는 차가운 교회 예배당 마룻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지에 나간 자식들의 안위를 당부하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처자식을 두고 월남한 '평양 할아버지'도 기도했다. 그 사이에 권 선생도기도를 했다. 그의 기도는 더 간절했다. 동화를 쓸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아프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종소리는 그에게 기도였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종은 한 여름에는 새벽 4시와 저녁 8시, 겨울에는 새벽 5시와 저녁 7시가 되기 30분 전마다 쳤다.
일직교회는 일본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이 되자 부모님을 따라 고향에 돌아온 직후부터 다니던 교회였다. 여기서 그는 종을 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을 모아 인형극을 하거나 동화를 들려주던 주일교사 노릇도 했다.
그가 치던 교회종탑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새벽마다 일어나 종을 치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가 살던 종탑 옆 문간방은 헐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일직 운산장터에서부터 걸어서 이 문간방까지 찾아와 권정생 선생의 평생 문우(文友)이자 후원자로 지낸 이오덕 선생과의 교류도 선연하게 남아있다.
권정생 동화나라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신 후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이 만들어졌다. 재단은 일직에서 대구로 나가는 국도변의 폐교된 옛 '남부초등학교'에 <권정생 동화나라>를 만들어,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품과 저작을 전시하고 있다.
교실을 개조해서 꾸며놓은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연보와 일대기가 잘 정리되어있다. 다른 교실에서는 <강아지똥>과 <엄마까투리> 등의 선생의 대표작품 속 캐릭터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공간도 조성돼 있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일직면 성남길 119번지에 있다. 안동 일직에서 대구방향으로 가다가 이정표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학교운동장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어 주차공간은 아주 넓다.
권 선생은 평생 병마와 싸웠다. 돈을 벌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가서 일하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해 건강을 잃었고 폐결핵을 얻었다. 폐결핵은 그가 평생 짋어진 십자가와도 같았다.
동화 <강아지똥>의 당선은 그의 삶을 동화작가로 살아가도록 한 이정표였다.
1969년 '기독교교육'의 공모에 당선된 그는 당선소감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녔는지 짐작해 본다.
"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는 거기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생명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느낍니다.
강변의 돌멩이, 들꽃,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지푸라기랑 강아지똥까지 나는 미소로써 바라보며 그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외로움과 슬픔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것들의 울부짖음에 공감을 가지며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내게 찾아오는 어린이들, 내게서 멀어져 가는 어린이들 모두가 메마른 바람결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곳엔 참된 기쁨도 없습니다. 누군가 따슨 손길로 어루만지며 함께 울어줄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어린것의 하나입니다.(중략)
꽃이 피는 봄을 찾아 굳세게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동화 속에 내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잡고 외롭지 말아야겠습니다."
서명수 슈퍼차이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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