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 관련,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미·소 양측은 조선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나, 민중 세력의 참여 방식과 정치 단체의 인정 범위를 두고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5월 21일자
1947년 지역 신문과 주요 일간지는 앞다투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논의 내용을 다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사실상 반으로 쪼개져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한 회의여서다.
이미 1946년 진행했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 2차 회의의 성과를 갈망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이 회의가 성사되지 않으면, 남북으로 쪼개진 민족이 영영 봉합될 수 없다는 위기감도 거세지던 때였다.
◆ 1차 협의의 파행... 통일 정부 좌절
1945년 소련의 모스크바에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이 모였다. 이날 7개 의제가 논의됐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의 신탁통치였다. 이들은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신탁통치를 하기로 했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두고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다. 국제적 지위에서 우위를 쥐고 있는 미국 측은 자신들을 옹호하는 우파가 강화되는 기점이라 봤고, 소련은 한반도 내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좌파 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북한과 남한은 이념적으로 대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남한에 한반도 전체 인구의 2/3가 집결했고, 주요 식량과 공업물 생산을 담당했다. 반면 북한에는 광물 자원이 매장돼 있어, 남한의 공업물 생산에 필요한 철과 화학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분란이 지속될 경우, 양쪽이 경제적으로 모두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첫 회의는 1946년 3월 20일 열렸다. 한국의 입장을 대변할 '협의대상자'를 누구로 둘 것인지가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당연하게도,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이들을 주 협상대상자로 내놓길 원했다.
소련 측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 내 협의대상자를 두고 구체적인 조건을 내놨다. 모스크바 3국회의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고, 민주적이며, 장차 한국을 '반소련 집단'으로 키우지 않을 단체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미국 측은 정반대의 의견을 개진했다. 3국회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신탁통치 반대자'를 배제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의견 차가 좁혀질 리가 없었다. 결국 5월 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돌입했다.
◆ 반복된 문제... 분단 못 막아
이듬해인 1947년 속히 혼란을 봉합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됐다. 국내에서는 '협상 대상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동위원회에 참가 청원서를 제출한 남북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각각 425개, 36개에 달했다.
참가 열의가 뜨거워지자, 공동위원회 측은 6월과 7월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합동 회의를 가졌다.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 남북한에 소재하고 있는 여러 정당과 사회 단체의 자문을 구하겠다는 의도에서다.
하지만 같은 문제가 또 한 번 불거졌다. 미국 측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들도 포섭하고자 했고, 소련 측은 반탁주의자를 배제해야 한다고 맞섰다. 미·소는 참여를 원한 이들이 좌익인지 우익인지, 신탁에 동의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데 매달렸다.
결국 지루한 공방은 '협상 파행'으로 이어졌다. 소련 대표단은 10월 21일 서울 철수를 발표했다. 사실상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해체했다.
책임을 넘겨받은 유엔 총회는 통일정부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하지만 소련이 위원단 북한 입국을 거부하면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시행하기로 선회했다. 이후 남북은 돌이킬 수 없는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 시도 빛났으나 성과 없었다
협상 파행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숨기지 않은 채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국내 정치 세력 역시 통일 정부 수립보다 향후 권력 구도에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는 데 몰두했다. 약 500개에 이르는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황에서 통합된 민족 의사를 도출하기란 구조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가 분단 이전, 한반도 문제를 협상으로 풀어보려 했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는다. 형식적이었을지언정 미국과 소련이 두 차례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 테이블에 올렸고, 통일 정부 수립을 공식 의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 시도가 불발되면서 분단이 굳어졌고, 이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됐다.


























댓글 많은 뉴스
장동혁 "12·3 비상계엄은 잘못된 수단…국민께 깊이 사과" [영상]
배현진, 故안성기 장례식장 흰 옷 입고 조문…복장·태도 논란
[인터뷰] 추경호 "첫째도, 둘째도 경제…일 잘하는 '다시 위대한 대구' 만들 것"
"이혜훈 자녀들, 억대 상가 매매…할머니 찬스까지" 박수영 직격
무안공항→김대중공항... "우상화 멈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