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19)

어쩌면 은유도 그때, 나를 위해 연극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은유 같지 않는 은유를 보면서 나는 문득문득 불안 같은 걸 느끼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얘기해 버린 걸 후회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은유는 통통 부은 얼굴로 학교엘 왔었지. 은유는 갑자기 배가 아파 약을 먹고 많이 잔 탓이라고말했지만 혹시 은유가 그 충격으로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건 아니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암니옴니 캐묻는 가족들에게 변명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밤새 자반뒤집기를 한 건 아니었을까. 결국은유는 나 때문에 가슴에 암종 같은 비밀 하나를 박어두어야 하는 괴로움을 지니게 되었다. 비밀을 지니고 있는 일이,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일찍이 프리기아의 이발사가 웅변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왜 그랬을까. 나 혼자 감당해도 충분한 슬픔을 여리고 투명한은유의 가슴에 무참히 주입시켜 버리다니."은유야, 나 너한테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절대로 이유를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어느 날,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사먹고 귀가하는 길에 나는 마침내말해 버렸다. 이미 나의 얼굴에서 심각한 표정을 읽어 버린 은유는, 그러나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걸음을 멈춘 은유는 어느 집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자주색 라일락을 담담히 올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실은 우리 엄마,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야. 자살해 죽었어. 언젠가 내가 말했지. 우리 집에 꿈의 방이 있다고. 그 방에서..."

그래도 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짝 담장 쪽으로 발을 옮긴 은유는 라일락의 은은한 향내에 도취해 있었다.

"지금 내 가방에 엄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도 갖고 있어. 얼마나자상하고 정성 들여 썼는지 꼭 외국 여행 나기시기 전에, 우리가 못 미더워신신당부하시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 너, 내 말 듣고 있니?""....."

그래도 은유는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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