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동인도에 착륙한 이래로 구라파 각국의 원정대들, 특히 상업자본의 원정대들이 동양으로 몰리기 시작했다.포르투갈 상인은 1518년(중종 13년, 기묘사화 전년)에 중국 광동에 입항하여통상허가를 얻었고 스페인은 1565년(명종 20년, '황해도 농민 반란'의 수령인 임꺽정이 피살된 3년 후)에 필리핀을 점령하고 극동무역에 착수했다. 영국도 1600년 동인도회사를 창립하고 중국에서 상품판매를 늘리는 등 서양 자본주의의 마수는 동으로 동으로 뻗쳐졌다. 서세동점의 포위권에 들어가 있던조선도 더이상 '은자의 나라'일 수 없었다.17세기 초(선조대) 이태리사람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 마카오에서 조선얘기를 듣고가서 조선에 관한 것을 구라파에 소개하였는데 이는 네덜란드인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 뒤 조선을 소개한 연대(1668년)보다 50~60년이나 빨랐다. 이때 카를레티는 조선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로마에 가서 '안토니오코레아'로 개명시켰는데 그의 후손이 코레아란 성을 갖고 아직까지 이태리에살고 있다.
이처럼 서구제국이 자본주의적 팽창열기에 휩싸이고 있는데도 조선사회는 '세계화'와는 담을 쌓고 당파싸움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철저한 '존화양이론자'였던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선각적 안목을 깨치고 선교사이자 우수한 과학자인 아담샬(탕약망)로부터 '시헌력'(시헌력)등 서양 역법을 배워오는등 서구과학에 비상한 이해를 보였던 아들 소현세자(소현세자,인조의 장자)의 모살설에 휘말렸다.
귀국한지 두달, 발병한지 사흘만에 급서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인조실록은'세자의 시신은 진흑으로 변해 있었으며 칠혈(칠혈)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독약에 중독된 사람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역사를 꺼꾸로 되돌릴 수야 없는 일이지만 소현세자가 왕통을 이어갔다면 한국의 세계화는 이미 3백50여년 전으로 앞당겨졌을 지 누가 알겠는가.소현세자가 배우고 온 아담샬의 시헌력(시헌력)을 수입하여 사용할 것을 적극 건의한 사람은 진보적인 유학자이자 실학사상의 선하로 일컬어지는 잠곡김육(1580~1658)이다.
이 시헌력은 4계절의 변화를 일상생활에 맞춘 것으로 1653년(효종 4년)에 4백년간 사용되어오던 구식역법을 대신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성균관 태학생 시절,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다섯학자를 문묘에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계와 학계의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던 김육을실학자에 편입시키느냐는 논란에 대해 역사학자 천관우는 '한국사의 반성'에서 "실사구시를 실학의 기본개념이라고 한다면 김육은 마땅히 실학자로 지목되어야 할 것"이라고 잠재웠다.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한 '조선철학사'도 김육은 경제면에서 일련의 개혁안을 제출하여 실학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조 효종 양대에 자주 연경을 내왕하여 외국의 사정에도 퍽 밝았던 그는 임진 병자 양란이후의 조선의 재정적 위기를 가장 진지하게 다루어 일종의 경제개혁책인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으며 주화를 통용시키자는 '용전론'(용전론), 수레나 차를 만들어 교역을 편하게하자는 '용차론'(용차론)을 폈었다.문묘 배향 파동이후 경기도 가평에 은거, 호를 '잠곡'이라 지었던 그는 이때체험한 민생고와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부단한 경제개혁을 꾀했다.'대동법'은 당시는 중앙의 각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토산품을 백성에게 부과하여 지방관이 공납케하던 공물법을 폐지하고 미포로 대납하자는 것이다. 이공물법의 부과와 징수에 따른 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상인이 대납하고그 몇배를 징수하는 모리행위를 하는 '방납'과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물품까지 마구 납품하도록 하는 폐단이 비일비재했다.
이 법은 김육보다 먼저 이원익이나 조익의 건의에 의하여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서도 잠시 실시되었다가 방납을 업으로 삼는 공인과 과중한 부담을 소작농민에게 일방적으로 이담시키고 있던 대지주들의 반대공작에 부딪힌데다가 제도상 허점들이 발견돼 폐지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김육은 대동법의 성공적 실시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를 제도화하여 제도상의 미비점을 수정 보완하였고, 시행법규인 '대동사목'을 작성,완전한 법규로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공로자로 꼽히고 있다. 그가 주장한 충청도 대동사목은 타 지방에 알맞게 수정, 시행되기까지 했었다.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성공적으로 시행되자 다른 도의 도민들도 그 실시를 원하여 김육이 세상을 떠난 효종 9년(1658)에 그의 아들인 김좌명에 의하여 전라 경상 황해도의 차례로 대동법이 실시된 것이다.
김육이 평생을 바친 '대동법'은 모든 전토에서 결마다 12말의 쌀 또는 마포면포를 징수하여 이로써 도내의 모든 경비와 그 도에서 부담하였던 중앙의일부의 경비에 충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농민들이 농사를 통하여 얻는 수입량에 따라 균등한 세부담을 갖게 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동시에중앙및 지방재정을 통제함으로써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유지하는 목적을 갖고있었다.
그러나 너무 실시에만 조급하여 엄정한 전토측량과 관기의 확립이 따르지 못하여 일시적으로는 성공했다해도 결국 대동법 실시 이전보다 과중한 부담을지우는 결과가 되었다.
국방대학원 김한식교수는 잠곡의 경제개혁정신을 '치자의 위민사상'으로 파악했으며 인하대 한영국교수는 "지봉 이수광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점에서, 구암 한백겸은 철학 사상적인 입장에서, 잠곡 김육은 새로운 문물 제도의 도입과 위민적인 사상에서 국민의 편익을 위해서 많은 고민과 실사구시적인 노력을 했다"고 평가하고 이런 정신이 모여서 실학의 큰 물줄기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는 대동법이외에도 주화의 통용(용전론)과 차를 사용함으로써 교역을 편하게 하고(용차론) 수차를 사용하여 관개사업을 발전시키려하였다.용전론은 조선 초기에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주화의 유통이 오늘날과 같은 화폐의 기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용전사상은 대동법 실시때에 제도면에 반영되어 쌀과 포 대신 전납(전납)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전납의제도화는 뒷날 주화사용에 크게 이바지했다. 1651년 상평통보(상평통보)의주조를 건의하여 서울 서북지방에서 유통하게 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소실된활자를 새로이 제작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또 북경에 사신으로 다니면서 수레의 필요성을 느꼈던 잠곡의 용차론은 당시 인부와 마필 뿐이던 육로 교통상 혁신적인 발상이었으나 끝내 제도화하지 못하였다."그의 사상은 봉건경제의 체제가 이미 자체의 견고성을 잃어버린 시기에 있어서 중소 지주및 소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파악한 최익한('실학파와 정다산'중)은 '북학의'를 인용, 김육의 용전론과 용차론이 초정의 고조였던 박수진의 참모 역할이 컸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훗날 박연암 박초정일파가 적극적으로 주장한 차제설, 흥상론및 통화론이 그들의 영향을 받은것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며,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에게도 큰영향을 끼쳤다.
그가 문묘배향사건 이후 은거했던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17일 잠곡추모제가열리며 대원군때 훼철된 잠곡서원복원추진위원회(회장 정하섭)가 결성돼 있다. 현재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 안전유전지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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