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 시리즈-조선의용대

중국의 우리 2개 독립운동계중 범칭 '김원봉계열'은 중일전을 맞아서도대응에서 임정계열과는 달랐다. 임정측이 피란에 2년 이상 매달린 것과 달리이들은재빨리 군대 조직에 착수한 것이었다.전쟁이 터진 3일 뒤 우리측의 김구-김원봉-유자명선생 등은 남경에서 중국측의 장개석 장군을 만났다. 연구서에 따라서는 우리측이 찾아갔다고 한 경우도 있고, 중국측에서 불렀다는 서술도 있다. 이 만남 이후 두 계열은 대응방식을 달리한다.

이 회동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한국 청년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공작을 해 전의를 상실케 할 요원이필요했다. 그 요원들은학식있고 일본말에도 능통해야 할 터였다. 또 일본군에는 한국 징집병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여러가지로 한국 청년요원들이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회동 후 임정측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훈련생을 모집하지않았다.반면 약산 김원봉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얼마전 국내 TV에서 전 북한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씨는 "나를 포함한 상당수 청년들이 중일전에 자극받아 임정에 갔으나 그곳에서는모집 의향이 없어 약산 쪽으로 몰려 갔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모인 한국 청년은 90여명, 모두가 약산 계열에서 모집한 경우였다.

**독립중대로 편성**

이들은 37년12월1일 중국 사관학교에 입학, 6개월 과정의 훈련에 들어갔다. 주로 호북성 강릉에서 훈련받으면서 이들은 한국인 독립 중대로 편성됐다. 교관은 당시 중국군 대좌였던 김홍일과 김두봉 등등이었다.약산계열은 남경이 함락될 때 무한을 피란지로 삼은 것도 임정측과는 달랐다. 무한은 임정측이 장사까지 가느라 지나친 바로 그곳이지만 사실상의중국군 항일전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국민당군과 다시 손잡은 공산군의주은래도 여기에 대표부를 차리고 있었다. 이로인해 일본군은 1백만 대군을투입해 무한 점령에 혈안이었고, 소련등은 무한 방어를 돕기 위해 공군을파견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후 약산계열은 이 중국군 중추와 행동을 계속 같이 했다. 중국군이 패해계림으로 옮길 때는 함께 계림으로 갔으며, 다시 중경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약산은 중국으로부터 매월 3천원씩 지원 받았으며, 나중에 의용대가 전선에 나간 후에는 월1만6천원이나 되는 많은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기록이 있다. 이때 약산의 형편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는 증언도 있다.

약산은 38년10월 계림으로 옮기기까지 10개월을 무한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무한 탈출 직전인 이해 10월10일 무한 기독교회관에서 '조선의용대'를 출범시킨다. 형식도 중국군 소속이고 실제 활동 역시 중국군 보조역이었지만, 이는 작잖은 사건이었다. 약산의광주 황포군관학교 스승이기도 한주은래는 의용대가 발족하기 전에 이들을 방문해 격려하는 등 큰 기대를 표시했다. 프랑스 기자들은 의용대 탐방 기사를 본국으로 송고했다.**약산이 대장맡아**

의용대가 출범하던 즈음 임정측은 3개월전 막 남목청사건을 겪고 광주까지피난한 뒤 다시 유주로 유랑길을 떠나느라 정신 없을 때였다. 이때문에 임정은 그 2년여 뒤에야 정식 군대인 광복군을 발족시킬 수 있었다. 임정측 청년들이 자발적 소규모 첫군사조직을 만들려 하는 것조차 의용대 발족보다 4개월이나 뒤의 일이었다.

이렇게 의용대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10개월 전 중국 사관학교로 훈련보내 놨던 청년들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5월24일에 졸업하고 김홍일 인솔 아래 6월2일 약산이 있는 무한으로 돌아왔다. 이에 약산은 중일전발발 1주년 되던 38년7월7일을 기해 중국 정부에 의용대 창설을 제안하고,중국의 27주년쌍십절에 맞춰 10월10일 성립식을 갖는 등 중국의 관심을붙들어 두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했다.

창립 당시 규모는 2개 구대(구대) 1백명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 장교급이어서 오합지졸 중국군과는 비교 안될 높은 수준이었다. 대장은 약산 자신이 맡았다. 이어 규모도출범 2개월만에 1백40명, 일년만에 3개 구대 3백30명으로 커져 갔다.

당시는 무한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의용대는 창립 직후 곧바로항일 전투에 투입됐다. 그러나 15일 후 무한이 함락되기 직전 대원들은 중국군에 배속돼 전선으로 출발하고, 의용대 본대는 중국군과 함께 계림으로이동했다.

**6개전구에 배속**

제1구대는 중국9전구로 배속돼 사령부가 있는 장사로 간 뒤 산하 일선부대로 나뉘어 배속됐다. 제2구대원 중 26명은 북부 낙양에 사령부를 둔 중국군 1전구로 배속됐으며, 나머지 15명은 호북성 노하구(노하구)의 제5전구로, 제3구대는 강서성 상요(상요)에 사령부가 있는 중국군 3전구로 배정됐다. 3백명 남짓한 우리 용사들이 중국 전역 6개 전구 13개 성의 항일전선에 나선 것이었다. 소규모로 나뉘어 배속된 것은 일본군 대상의 삐라 살포등 선무 공작과일본군 포로 심문 등에 이들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한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무창과 한양/한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두지역은 57년도에 장강대교로 연결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같은 쪽에 있는 한양-한구도 한수로 갈려 별개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한은 3개 도시가 한데 뭉쳐져 인구 3백80만의 통합시(외곽 포함 7백만)가된 셈인데, 한양은 인구가 30만 정도에 불과, 실제론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한구와 무창이 맞보고 있는 양상이었다.

그 중 한구가 가장 빨리 발전했던 곳인듯 했고,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는YMCA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는 여황피로(여황피로)10호에 자리 잡고 있으나,그 당시에는 그보다 북쪽으로 1백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간부 나장육씨가일러줬다. 그는 이 YMCA가 1912년에 창립돼 활동하던 중 일본군이 건물을파괴했다고 말했다. 지금의 서양식 4층 건물은 미해군이 쓰던 것이라는 얘기였다.

중국에서는 YMCA도 81년도 이후에야 다시 허용됐었다고 나씨는 말했다.그러나 지금은 온통 미용-육체미 강습 광고가 회관 앞 게시판을 메우고 있는것으로 봐 우리와 별차 없구나 생각하게 했다.

본래 회관이 있었다는 곳은 남북으로 난 여황피로와 동서로 난 중산대로가맞닿는 중산대로 1090호 길모퉁이였다. 그곳은 옛 프랑스 조계였다고 했으며, 지금은 6층짜리 '부호(부호)가구점'이 들어서 있었다.

**본부 공원자리로**

이렇게 의용대를 출범시킨 뒤 의용대 본부가 피난 간 계림은 특이한 형상의 산이 3만개나 솟아나 세계적 관광지가 된 곳이다. 재질이 흙이 아니라석회석이어서 그런 모양이 나왔다고 했다. 계수나무가 많아 가로수까지 그것으로 할 정도여서 이름이 계림이라는 이 도시는 인구가 42만명이라고 했다.도시 남북으로 리강(리강)이 흘러 관광객들은 주로 이 강 위의 유선을 타고묘한 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대우가 이 도시에 버스공장을 만든다고 했다.

그 계림에 약산의 의용대 본부가 자리잡았던 곳은 당시 동령가2호였다.그러나 지금은 일대가 '칠성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계림에서는 가장 큰공원이라고 했고, 봉우리가 7개인 산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고도 했다.

취재팀 자문역 김희곤교수는 공원내 롤러스케이트장 앞 1천여평 크기의잔디밭 어디쯤이 옛 조선의용대 본부 자리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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