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7)초창기 향토감독(상) -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

향토 출신 영화감독의 효시는 김유영(1908~1940)과 이규환(1904~1977)의 등장에서 찾을수 있다.일제치하 한국영화의 시련기에 두사람은 우리 영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온몸으로 부딪치며 큰 영향을 남겼다.

경북 선산 출신인 김유영은 1928년 '유랑'으로 감독 데뷔한후 '혼가' '화륜' '애련송' '수선화' 등몇편의 영화만 남긴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까운 인재였다. 한국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그린 신경향파 영화를 찍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35년 대구 코레아 영화제작소에서 김유영을총지휘자로 삼아 촬영하던 영화 '황혼'도 구금사태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예술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1940년 마지막 작품인 '수선화'를 찍을 무렵, 그의주머니는 항상 비어있었고 굶주려서 꼬르륵 소리가 뱃속에서 절로 나왔지만 그는 큰소리를 탕탕쳤다.

"김유영의 작품에 출연하려면 단역이라도 대학출신은 돼야 한다네"

그는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됐지만 리어카에 몸을 싣고 '수선화'의 연출에 매달렸다. 그러나 끝내완성을 보지 못한채 냉면을 청해 먹다 눈을 감고 만다.

조감독인 민정식에 의해 완성된 '수선화'는 나라잃은 겨레의 심금을 울려주는 수작이었다. 20년을수절한 과부가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김일해, 문예봉, 김신재, 이금룡등이 출연했다.

김유영보다 4년뒤인 1932년 '임자없는 나룻배'로 데뷔한 대구 출신 감독 이규환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음악가 현제명, 연극인 홍해성과 함께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뒤 일본으로 건너가 연출수업을 받고 1932년 귀국,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로침체된 한국영화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민족영화의 선구자이자 간판스타로 인기를 누렸던 나운규는 이 신출내기 감독의 출연 제의를 받자마자 인력거꾼 춘삼역에 맞게 멋진 올백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릴 정도로 이 작품에 애착을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임자없는 나룻배'는 문명의 그늘을 등지고 사는 가난하고 소박한 뱃사공부녀의 비극적인 인생을통해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저항의식을 사실적으로 부각시킨 작품. 서정적.낭만적 영상으로 한국영화예술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운규, 김연실, 문예봉, 김영미 등이열연, 우리 민족의 혼을 담은 영화로 큰 인기를 끌었다. 〈金英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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