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타계한 여성계 대모

'법과 인습에 억눌려 우는 한국 여성과 평생 눈물 흘릴 것'이라던 '여성계의 대모' 이태영(李兌榮) 여사가 평생 이 일에 혼신을 다하다 이 세상을 떠났다.

이 땅의 모든 억압받는 여성 편에 서서 그들의 '어머니'가 돼주었던 그는 '우리나라 현대여성사그 자체'였다.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의 '최선'을 보여준 이 시대 한국 여성의 '표상'으로도 칭송된다. 축첩 반대, 가족법 개정 등 그가 앞장서 이끌어낸 결실은 눈이 부시며, 한국 여성 해방사와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

1914년 평북 운산 태생인 이여사는 36년 그 뒤 외무장관을 지낸 고 정일형(鄭一亨) 박사와 결혼했으며, 46년 주부로 여성 최초의 서울대 법대생이 됐다. 52년에는 4남매를 둔 어머니 신분으로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 여성변호사 1호가 됐다.

5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설립해 여성 권익 향상에 투신했으며,한때 이화여대 법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같이 그에게는 '한국 최초'라는 화려한 수식어들이따라다녔지만 그보다는 힘없고 가난한 여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삶 때문에 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었다.

항상 우직하게 일만 한다고 '황소'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고난과 함께 하는 자'를 의미하는 보라색 한복을 즐겨 입기도 했다.

남편인 정일형박사가 항일운동으로 투옥중일 때 누비이불을 직접 만들어 파느라 가위질을 많이해 손가락이 휘어졌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여성 해방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에도 몸바쳐온그는 인권운동으로 75년 막사이사이상을 받는 등 많은 수상 경력도 지니고 있다.특히 89년에 개정된 가족법은 "37년에 걸친 가족법 개정사가 곧 내 인생"이라고 할만큼 그가 혼신을 바친 결실이었다. 이제 그 큰별은 졌지만 남긴 업적들은 길이 빛날 것이다. 그가 평생 일구고 가꾼 뜻이 빛바래지 않도록 그 맥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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