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29호실 시비

도대체 이게 무슨 글씨일까. 이집트 람세스2세 무덤벽화에 쓰인 상형문자 도 아니고 아직도 인류가 해독하지 못했다는 마야문자도 분명 아니다. 그렇 다면 페르시아인의 설형문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사실은 우리 한글이다. 조 금 각도를 바꿔서 썼을뿐이다.

국회529호실의 안기부 첩보보고서를 둘러싼 시비가 하 시끄럽기에 어느 전 직 안기부 고위간부에게 필자가 시조 한 수(首)를 골라주며 첩보원의 기록답 게 암호글씨체로 써보라고 일부러 부탁해서 받은 글씨다. 내용이 궁금하신 독자께서는 거울앞에 서서 이 글을 옆으로 세워 비춰보면 곧장 이런 시조 한 수를 읽으실 수 있다.

'검으면 희다하고 희면 검다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전혀없다.

차라리 귀막고 눈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

조선조 숙종때의 가인(歌人)인 김수장의 시조다.

정보요원의 첩보수집기록은 개인수첩이든 보고서든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 도 마지막 보고 직전까지는 분실, 탈취, 절취, 복사같은 누설의 가능성을 전 제한 상황에서 작성해야 완벽한 보안이 된다. 그것이 첩보원 세계의 프로정 신이고 룰이다. 그래서 안기부 요원들 중에는 개인 신상기록까지도 습관적으 로 각자 개발한 암호체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응용해 쓰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말까지 음어를 사용해서 대화할때도 있다.

이번 529호실 사찰시비에서 관전자인 국민들이 느끼는 원초적 이미지는 사 찰 논란에 앞서 명색이 한 국가의 정치심장부의 동태를 체크하고 있다는 안 기부 요원의 정보수집솜씨가 어딘가 미욱스럽다는 것이다. 안기부 주장대로 야당국회의원들을 소환조사해야할 만큼 국가안위에 관계되는 '국가기밀'수준 의 첩보라면 적어도 퇴역 안기부요원처럼 요식을 정보기록답게 기록해뒀어야 좀 더 프로다웠을 것 같다는 말이다.

폐쇄된 밀실에서 그것도 보안이 철저한 자국 국회안에서 굳이 암호체까지 쓸 필요가 뭐 있으며 논란의 핵심은 사찰이냐, 통상업무냐, 탈취냐, 확보냐 는 문제일 뿐이라고 하면 애써 따질 것도 없다.

따지는 쪽에서 아무리 검은 것 같아서'검다'해도 상대쪽이 '희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야당이 '진입 '이라고 하면 여당과 안기부는 '난입'이라 하고 야당이 문건 '확보'라고 하 면 상대는 '탈취'라고 한다. '안기부 분실'과 '정보위 자료실'이 서로 갈리 고 '개인메모 잡기장'과 '사찰보고서'로 다툰다.

진실은 분명 하나일텐데도 서로 희다, 검다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많 은 국민들은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전혀 없는'양비(兩非)적 정치불신에 서 '차라리 귀막고 눈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는 정치혐오의 공간으로 비켜 서게 되는 것이다.

이번 529호실 싸움은 법리와 순리의 다툼이 뒤얽혀 있는 만큼 어차피 지리 한 게임이 될 것이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승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희면 검다하고 검으면 희다하는 독선의 다툼이 더욱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무도 민생문제를 제쳐둔 싸움을 눈여겨 보려하지 않는 냉랭한 관전석의 냉담을 읽 어내지 못하고 읽으려 들지도 않는 배짱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아 마도 비뚤어진 독선과 득세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배포일 것이다.

자기가 한 짓은 부끄럽게 여길 줄 모르고 남의 잘못만 역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잠언이 어울릴 것 같다.

金 廷 吉〈비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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