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실밖의 넓은 세상-늘어나는 댄스동아리들

경북기계공고 3년 유주영군은 학교가 파하면 대구 달서구 청소년수련관으로 향한다. 문화관람실 오후 7시. 준석이, 정구, 정수형, 건우형 등 멤버들이 모인다. 귀를 찢을 듯한 리믹스 음악이 울리면, 그때부터 두 시간, 세상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나와 우리뿐. 땀범벅이 되도록 몸을 흔든다. 서로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즉석에서 안무도 바꿔가며, 호흡을 맞춘다.

"18일 날 계명문화대에서 대회가 있거든요. 상에 연연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대구에선 입지를 굳힌 팀인데 체면치레는 해야죠". 팀 이름은 P.I.C. '폐인 클럽'이란 뜻이라면서도 천연덕스레 웃었다.

동아리를 결성한 건 2년 전. "춤 좀 춘다는 아이들이 청소년수련원으로 모인다는 얘길 듣고 한 수 배우러 갔죠. 거기서 뜻 맞는 사람들끼리 만든 팀이예요". 한 춤 한다는 꾼들이 모인 덕에 작년엔 여러 대회에서 대상을 휩쓸었다고 했다. "올해도 몇 개 대회 우승은 차지하고 싶습니다". 유군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왜 춤을 출까? 춤 추는 10대들이 한둘 아니다. 대구 신천변이든, 국채보상공원이든, 지하철 역이든, 공간만 있으면 춤을 춘다. 한두 명도 아니고 대여섯 명이 호흡을 맞춘다. 옛 어른들이 보면 "덱끼" 소리가 먼저 나올 정도. 그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좋아서죠. 좋아서 하는데 또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나요. 왜 좋냐고요? 금방 몰입되거든요. 거기에는 나만의 세계와 내가 꿈꾸는 것들이 있고, 나는 상상 속의 내가 될 수도 있죠". 협성고 댄스동아리 E.O.D 출신 백대승(영남대 1년)군의 설명교내 동아리를 인정하는 고교도 많아졌다. 학생들의 요구도 요구려니와, 학교측으로서도 교내 축제 등 여러 행사에 '춤꾼'들이 필요해졌기 때문. 구미 경구고 댄스 동아리 C.O.D 지도교사 권은숙씨는 5년 전 학생들의 동아리 결성을 주도했다. "처음엔 교장 선생님이나 주위 선생님들로부터 눈치를 많이 받았죠. 공연히 아이들 불량끼나 부추긴다, 학교 분위기를 해친다 어쩐다 하면서요. 그렇지만 대회에 나가 한두번 상을 타 오고, 교내 축제 때 인기가 폭발하자 점차 자리를 잡아왔죠.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동아리 만들기도 쉬운 편이예요".

춤꾼들이 많아지자 대회 수도 제법 많아졌다. 이번 달에 열리는 대회만 얼핏 꼽아 4개나 된다. 지난 12일 달서구 청소년 어울마당에서 댄스경연이 있었고, 18일엔 계명문화대, 19일에는 청소년수련원, 25일에는 중구청에서 대회를 연다. 북구청은 20일 대구지역 고교 댄스 동아리들을 모아 '북구 춤판'을 벌일 예정.

달서구 대회에는 16개 팀이 참가했었다. 구청 권오남 담당자는 "장소만 만들어 주면 학생들은 저절로 모인다"고 했다. 2, 3년 전부터는 안내 공문을 보내면 학교들도 적극 협조하기 시작했고, 부모들이 응원 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

부모들도 과연 변했을까. 동부여고 2년 정미림양은 "처음에는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요즘은 대회도 보러 오고, 끝나면 맛있는 것도 사 준다"고 했다. 백대승군의 말은 뭔가 다시 생각케 했다. "민요나 옛날 춤 같은 것은 흥겨운 문화로 인정하면서, 요즘 학생들이 색다른 옷을 입고 이해 못하는 춤을 추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달서구 대회에서는 초교생인 김소형(6년)양 윤수(4년)군 남매가 단연 인기를 끌었다. 남매는 2년 전부터 부모의 적극 후원 아래 스포츠 댄스를 해 왔다고 했다. 아버지 김종대의 얘기. "무턱대고 공부시켜 대학에 보내기보다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요즘 부모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남매에게 뜻만 있으면 춤 유학까지 보내 줄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래'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은 다소 의외였다. 유주영군은 "곧 취업해야죠. 여유 있을 때 춤 추는 거죠"라고 했다. 권은숙 교사는 "댄스 동아리 학생들 가운데 춤 때문에 성적이 떨어진다든가, 탈선하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저 춤을 즐기고 싶을 뿐인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댄스 그룹의 백댄서가 돼, 잘 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그룹 멤버가 되거나, 솔로로 데뷔하는 연예인을 꿈꾸는 '황당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10대 춤꾼들이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공간 부족이었다. 아무데서나 춤 추는 듯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필요조건이 있기 때문. 학교에 동아리실이 있으면 최선이고, 그렇지 못한 교외 동아리들은 연습장을 구하느라 애 먹고 있었다.

"고교 때는 늘 지하철 교대역에 갔었죠. 거울도 갖춘 춤추는 장소를 만들어 뒀거든요".(백대승군) "처음엔 경북대생들의 동아리방에 얹혀 연습했죠. 학교에 동아리가 생긴 후로는 그 공간을 빌려 하지만, 교외 동아리끼리 대회에 참가하려면 연습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예요. 맘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곳이 많았으면 좋겠어요".(정미림양)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이 너무 당당한 게 10대들 다웠다. "언제 신문에 납니까? 부모님께 자랑해야죠"라고 좋아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춤추는 10대들, 그들에게 불량끼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맑게 빛나 보였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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